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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May 04. 2020

내 양손만큼의 희망

직장인의 심야 복싱 분투기

늦은 시간, 그러니까 하루가 저물어갈 때쯤의 복싱장은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지닌다. 이를테면 진중함 같은 거. 운동을 가볍게 즐기기에는 다소 늦은 시간인 만큼 그 시간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복싱이 너무 하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복싱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큰 자극이다.


거울이 됐건 샌드백이 됐건 가상의 상대가 됐건 자기 앞에 놓인 문제와 온몸을 다해 씨름하는 풍경에서 유추할 수 있는 깨달음 중 하나는 열심히 하는 사람이 모두 잘하는 건 아니지만(가장 대표적인 예로 내가 있다) 잘하는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복싱장 풍경은 그 자체로 엄중한 현실이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나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결과가 이것뿐이냐고 따질 수 없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는 이것밖에 안된다고 자조할 수도 없다. 남 탓도, 하소연도, 어리광도 통하지 않는 일종의 심판대인 셈이다.


냉혹한 현실이라고 해서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꾸준히 하면 변하긴 변한다. 짧은 시간에 체감하기 어려울 뿐. 여전히 어렵고 막막하지만 가로막는 지점이 조금씩 달라진다. 어색하던 동작이 점차 익숙해지고 샌드백을 때릴 때 나는 소리가 달라진다. 변화가 곧 성장이라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렇게 믿고서 뛸 수밖에 없다.


희망이란, 가능성이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캄캄한 한밤중의 복싱장 풍경이 곧장 이 세상의 작은 무대로 확장된다. 링 위로 폴짝 뛰어오르듯이. 비약은 원래 나는 듯이 뛰는 걸 부르는 말이니까. 매일 밤 나는 이 세상에 내 양손만큼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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