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1)엄마의 전화

by 석촌호수 주민

그 해 가을

전화 벨소리에 잠이 깼다. 늦잠이다. 휴대폰 화면엔 익숙한 이름.

'엄마'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전화를 걸까 했지만 계속 울리는 벨소리가 나를 보챘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공부한다고 서울 고시원에 집을 구한 아들의 늦잠은 그다지 관심 있는 소재가 아니었다.
안부를 오래 물었다. 전날 보고 가신 분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으셨나.
길고 긴 서론을 끝내고 본론은 뛰어넘으셨다.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떨리는 목소리는 겨우 참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신경 안 쓸게. 끊어”.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지금인데.

피시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동이 터서야 잠이든 고시생은 눈물이 났다.
할 수 있는 건 없어 더 화가 났을까.
나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매형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아님 누나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어제 본 엄마와 큰누나 얼굴이 떠올랐다.

오후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책을 덮었다.
누구보다 빨리 건물 밖을 나가 큰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긋지긋한 고시식당 밥을 피해, 엄마와 누나인지 소고기인지 모를 기대감에 휩싸여 달려갔다.
소고기는 만족스러웠다. 허겁지겁 먹는 아들과 달리 엄마와 큰누나는 입맛이 없어 보였다.

고시 공부하는 아들이 안쓰러우셨나. 고기를 양보한 채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눈치 없는 아들이 혼자서 먹어치웠다.


인생을 짧으니 즐기라는 엄마의 말.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거라는 누나의 말. 고시생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가 한 달 남은 날이었다. 거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 찼다.
사람들의 당당한 발길에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누나는 매형과, 엄마는 아빠와 함께 하겠지.

공부하는 아들을 위해 엄마는 비타민을 건넸다. 다시 3개월 뒤를 기약하고 인사를 나눴다.
2평짜리 고시원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보낸 엄마와 누나의 뒷모습은 무거웠다.

초초한 엄마는 계속해서 말을 돌렸다. 이만 끊으려는 아들에게 쓸데없는 용기를 냈다.

“너희 누나 매형이랑 헤어지게 됐다. 그렇게 됐다”.

다음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 방 맞았다는 느낌이 이런 기분일까.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었다. 슬픔은 무력함으로 변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게으른 고시생에게 주는 벌 치고는 가혹했다.
쌀쌀했다. 그렇게 가을과 겨울 사이, 느닷없이 불어오는 찬바람은 유난히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