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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혁수 Oct 27. 2019

취미를 물으면 이 글을 보여줄게요



열 살을 갓 넘겼을 때다. 마트에 다녀온 부모님이 경품에 당첨됐다며 ‘워크맨’을 건넸다. 딸깍 대며 움직이는 기계가 마냥 신기했다. 그날 하루는 종일 기분이 좋았다. 


다음 날 아빠와 집 근처 음반매장으로 향했다. 매장 벽면엔 ‘국내’, ‘외국’ 등으로 분류된 카세트테이프가 빼곡히 진열돼 있었다. 아빠는 ‘아바’와 ‘비틀스’의 베스트 앨범을 집었다. 엄지와 검지로 테이프를 달랑거리던 아빠는 “이거 진짜 좋아”라는 말을 덧붙이고 계산대로 향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매번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노래를 들었다. 등교할 때는 비틀스의 ‘Yellow Submarine’을, 침대에 누워선 아바의 ‘I Do, I Do, I Do, I Do, I Do’를 들었다. 테이프가 A, B면을 쉴 새 없이 오가는 탓에 워크맨 건전지가 자주 닳았다. 희한하게도 그때마다 뿌듯함을 느꼈다. 슈퍼에서 건전지를 집을 때마다 다시 한번 노래를 들을 생각에 설렜다. 이따금씩 혼자 음반 매장에 들러 테이프를 사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로 음악 듣는 게 취미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이 중요해졌다. 노래 듣기는 독서보다 못한, 고루하기 짝이 없는 취미였다. 조금은 번듯한 취미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가 가장 고역이었다. ‘취업’ 스터디를 하려 모인 사람들과 ‘취업이 안된다’며 몇 년 간 부어라 마셔라 한 탓에 운동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소서에 적어낼 거라면 활동적인 게 좋겠다’는 생각에 ‘크로스핏’을 취미로 써냈다. 같이 시험을 치렀던 PD 동기는 “대외용 취미를 미리 정해놓는다.”라고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취업을 했다고 끝난 건 아니었다.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심심하면 ‘취미가 뭐냐’ 물었다.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다. 얘깃거리가 떨어지자 어김없이 취미가 주제로 나왔다. 내 반대편에 앉은 사람부터 취미를 하나씩 말했는데, 분위기는 면접장과 다름없었다. 취미의 흥미 유발 정도가 나란 사람을 규정해 버리는 듯한 느낌의 압박이었다.


얼마 전 차를 쓸 일이 생겨서 시동을 켰다. 오디오에서 되게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 차는 엄마가 타던 낡은 SUV다. 10년이 넘은 차라 블루투스 연결은 고사하고 USB 포트를 꽂는 구멍도 없다. 그래서 주로 콘솔박스에 보관해둔 CD를 튼다. 중학생 때 엄마가 듣기 좋은 노래를 담아달라고 부탁해서 구워준  CD들이다. 미안하지만 엄마 의사는 반영이 안 되어있다. 온통 학창 시절 내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들 뿐이다. 처음 차를 받아 CD들을 발견하고, 오디오에 CD를 여러 번 욱여넣어 노래를 듣던 때가 생생하다. 보물을 찾은 느낌이었다. 더듬대며 가사를 따라 부를 때도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노래를 같이 들으면서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난 노래 듣는 걸 좋아한다. 특히 옛날 노래를 좋아한다. 이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몸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 활동적인 취미를 만들 일이 없고, 만날 친구들이 많지 않아 사교적이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팍팍한 현실에 더한 팍팍한 삶이다. 그저 삶에 위안이 되는 걸로 충분하다. 참 멀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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