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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Oct 30. 2018

그럴 수도 있지!

스스로에 대한 실망을 거두고 쓰기



그럴 수도 있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누군가에게 해주면 마음이 좋아지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모처럼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했거든요. 발단은 다툼에서 비롯됐습니다. 편히 쉬고 자야 할 집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층간소음 문제이다 보니 떨치려 해도 쉽게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원망이든 나에 대한 원망이든 어쨌거나 그렇게 골머리를 썩는 건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실망감으로 귀결됐습니다. 



 마음을 다잡고 정돈된 글을 쓰려고 할수록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특히 에세이를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생각을 써보자니 위선 같고, 그렇다고 한탄과 푸념을 글로 해소하자니 찌질할 것 같아서요. 설상가상으로 최근에 의욕적으로 임했던 일들에 연달아 실패하면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습니다.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글로써 마음을 풀어보려고도 했지만 그럴수록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일기조차 끄적일 수가 없었으니까요. 원래 뭐 대단한 걸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심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소한 글조차 쓸 수 없다는 게 제게 이토록 큰 문제일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더군요. 엄밀히 보자면 내 탓이 아닌 갈등으로 나 자신만 괴롭히는 일을 관두기로 했습니다. 쓰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는 일에 관한 좋은 글과 책에서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추천받아 지니고 있던 양서들의 목록을 꺼내 도서관에서 하나씩 찾아보았습니다. 도로시아 브랜디의 <작가 수업>, 박상우의 <작가>,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등 첫 장부터 마음에 쏙 든 책들이 역시나 끝까지 잘 읽히고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상기 도서들은 숭례문 학당 김민영 이사님의 강의에서 추천받은 책들 중의 일부입니다) 

   


 글쓰기와 글 쓰는 이에 대한 지혜로운 가르침들에서 나름의 공통점들을 발견했습니다. 작가란, 아니 작가가 아닌 사람일지라도 쓰고자 하는 욕구는 필시 자기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요. 이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섣부른 자기 검열이나 두려움에 멈출 것이 아니라 일단 써야 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쓰기 위해서 생각할 게 아니라 쓰고 나서 생각하라.'  




 실패해도 괜찮은 게 청춘의 특권

이라는 말은 과연 누구를 위함인지 종종 의문이 들곤 합니다. 위로의 의미인 건 알겠는데, 막상 실패한 청춘들에게는 과연 효용성을 갖는 말인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불안한 시기일수록 부러 실패를 무릅쓰고 싶은 청년은 없을 테니까요. 물론 압니다. 젊은이들의 실패를 부추기는 말 따위가 아니라 도전 의식이라든지 용기를 북돋기 위한 격려라는 것쯤은요. 하지만 말입니다, 다음의 말을 예로 한 번 들어보면 어떨까요? '병에 걸려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늘 건강하면 좋은 거지, 깨달음을 얻으려고 흔한 감기에라도 일부러 걸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을 두고 일갈한 방송인 유병재의 재기 넘치는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아프면 환자지 그게 무슨 청춘이냐!!' 


 이처럼 어떤 선험적인 이야기는 안 겪어본 사람들에는 때때로 교훈이 될 수 있지만 막상 그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는 속 편한 소리로 들리기 쉽습니다. 짧고 강렬한 말은 그래서 때때로 부연 설명이 필요한 법이지요. '실패는 청춘의 특권'이라는 말을 듣기 좋게 풀어쓰자면 '청춘이란, 실패해도 주위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얼마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기이므로 힘내십시오' 정도일까요.


 제가 참 삐딱한가 봅니다. 이렇게 잘 이해를 하고도 청춘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나이가 되고 보니 불만이 또 생기더라 이겁니다. 실패가 청춘의 특권이라는 게 비로소 와 닿을만하니까 이제는 그게 나 같은 30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영 개운치 않거든요. 실패할 권리를 청춘기에 국한한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말로도 받아들여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도 오히려 작은 실패에 예전보다 민감하게 굴어왔던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이 말이 참 좋다는 부연 설명을 위해 한참을 돌아온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거나 아쉬움을 토로했을 때 이를 듣고는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꾸짖는 사람이 좋을까요, 그럴 수도 있다며 위로해 주는 사람이 좋을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입장을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하소연을 듣고 한참을 잘난 체 하다 보면 웬만한 사람은 깨닫게 됩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조언해주듯 잘 하고 있나?' 그래도 뱉은 말에 책임은 져야겠기에, '그래서 내가 보기엔~' 또는 '너니까 하는 말인데~' 따위의 말들을 덧붙이려 한다면 최소한 그걸 듣는 상대방의 안색부터 한 번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실망을,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일수록 웬만한 일들은 사소하게 넘긴다고 하지요. 이들의 비결은 결코 타고난 대범함 덕분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양한 경험으로 쌓은 연륜이야말로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를 가능케 해주는 힘이라지요. 분하고 억울한 일이 생겼든, 누군가가 밉고 싫든, 그래서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멍청한 상태에 놓여있든지 간에-


그럴 수도 있지!


 이 한마디를 건네는 이가 곁에 있으면 좋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해주면 참 좋은 말. 어떠한 이유에서든 스스로에게 실망한 이들에게, 쓰는 것을 주저하는 이들에게 공감하며 꺼내든 이 말을 사람들이 더 많이 주고받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를 써내기 위해 저는 일단 다시 쓰기 시작했으니, 이제 조금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실망을 거두고 쓰는 일에 도전할 수 있을 것도 같구요.




*커버 이미지는 파스칼 캠피온의 일러스트 작품입니다.(http://pascalcampion.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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