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가 가능할까?
치킨을 먹는 남동생(영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따스하다. 누나가 자기를 보든 말든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영인과 달리 영주의 시선은 줄곧 동생을 향해 있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엄마 노릇까지 해 온 애어른의 삶은 동생과 마주한 모습에서 그렇게 짧고도 길게 표현된다.
김향기 주연의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더욱 주목받은 <영주>는 그런 영화였다. 짧게 풀어내기 쉽지 않은 사연과 감정을 짧은 러닝 타임(100분)에 눌러 담느라 얻은 것도, 잃은 것도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쉬이 다루기 힘든 상실과 결핍을 화면에 차분하게 담아냈다는 점에 나는 이 영화에 일단 의의를 두고 싶다. 그래서 아쉬움도 느꼈는지 모른다. 영화를 보며 영주가 겪어가는 상황에 빠져들려고 하면 할수록 그녀가 이미 처했던 상황과의 괴리감 또한 커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화 밖 사연의 그림자가 워낙 짙다 보니 영화 내에서 비추는 빛만으로는 어둠을 거둬내기에 부족해 보였달까.
영화 밖에서 벌어진 일, 어린 영주가 이미 처했던 상황이란 그녀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절대적인 비극이다. 영화 <영주>는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나서 겪는 일과 양자 모두의 감정 변화를 포착하려 한다. 여기서 피해자의 행위가 만약 '응징'이나 '복수', 그도 아니라 '용서'에서 비롯됐다면 에피소드야 뻔했겠으나 관객들의 공감은 무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주의 심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다. 그녀의 절대적 처지에는 공감하다가 막상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드라마에 완벽히 몰입하기 힘들었던 건 바로 이러한 상대성에서 비롯됐지 않았나 싶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영주, 영인 남매의 가정 형편은 영화의 초반 금세 밝혀진다. 집 처분 문제로 갈등하고 마트 알바에 나서는 영주의 일상을 통해 관객들은 일찍이 그녀의 고단함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해자의 고통은 고스란히 가해자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다. 영주의 부모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교통사고 장면이나 가해자의 얼굴이 화면에 등장할 필요도 없다. 소녀 가장 영주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그렇게 만든 이를 탓할 수밖에. 더욱이 근래에 급증하고 있는 비윤리적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하거가 판결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일들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는 현실이다.
이런 정황, 사연 속에서 그러나 가해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졸음운전으로 영주의 부모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자, 상문(유재명 역) 스스로 나선 게 아니라 시장 한가운데서 장사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영주에 의해 발견되는(혹은 찾아지는) 것이다.
그가 잘 먹고 잘 살고 있기를 기대(?)하던 스스로의 심리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건 나뿐이었을까. 알게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권선징악의 구도가 미리 그려져 있었기 때문일 게다. 그래야 되니까, 가해자가 파렴치한이어야 피해자는 더욱 위로받을 수 있을 테니까. 문득 영화 <밀양>에서 너무나 인상적으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신앙의 힘으로 마음을 다스려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를 용서해 주려고 교도소에 어렵게 찾아 간 여성. 웬걸, 평온하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이미 하느님이 저를 용서해 주셨다'는 죄수를 보며 울부짖던 배우 전도연의 모습은 이후로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
물론 <밀양>과 <영주>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의도적 살해가 아닌 실수에 의한 사고로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은 상문은 가해자인 동시에 그 자신 또한 피해자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추가적인 정황은 영화 소개글 외의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까지 언급하겠다. 아무튼 피해자 영주가 가해자 상문과 한 화면에 잡히면서부터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영주뿐만 아니라 관객들이 혼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소개 페이지의 이 표현은 괜한 말이 아니다. 다름 아닌 상문의 아내, 향숙(김호정 역)의 태도 때문이다. 그녀는 영화를 이끌어 가는 또 한 명의 주요 인물이자 이야기의 흐름마저 바꾸어 가는 존재다.
"영주 넌 좋은 애야, 아줌마는 알 수 있어."
이쯤 되면 영주도, 관객도 동요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미워하려고 찾아낸 이들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영주. 그만큼 따뜻한 보살핌에 목말랐던 그녀의 상처는 부각됨으로써 치유받을 수 있을까.
절대적인 피해자도, 절대적인 가해자도 있을 수 없다는 따위의 애매한 태도로 감상평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영주의 피해에 공감했기에 혼란에도 공감해 보고 싶었고, 내내 울상이던 그녀가 핑크빛 새 점퍼를 입고 활짝 웃는 모습에서 치유의 단초를 찾고 싶었을 뿐이다. 함께 마음 아파봐야 진정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야말로 영화 <영주> 속 영주에게 빠져버린 한 관객의 순진함이 아닐는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야 알게 됐다. <영주>의 차성덕 감독은 본인이 실제로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고. 이 사실을 접하고 나니 그러한 아픔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 감독의 영화에 이러쿵저러쿵 평을 늘어놓은 게 어쩐지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더는 피해자의 상실감을 섣불리 헤아리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영화는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상실은 실존에서 비롯되나, 영화는 어쨌든 허구의 설정을 근간으로 하니까 말이다.
* 차성덕 감독은 “영주와 똑같이 10대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삶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시간이 지나서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 때, 그 사고를 낸 가해자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들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이 야기를 확장해 나갔다.”라며 <영주>의 시작에 대해 밝혔다.
- 영화 공식 소개 페이지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2448)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