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참혹함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앳된 얼굴의 신참 장교 한 명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한다. 어느 대위와의 친분을 들며 그가 있는 최전방 참호에 배치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롤리 소위(에이사 버터필드 역)다. 별도의 전쟁 묘사라든지 에피소드 없이 그렇게 드러나는 순진함은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얘기로만 알고 있는 대부분의 관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퇴역 장교인 아버지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자원입대 했다가 죽음을 맞이한 막내 사무엘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저니스 엔드>는 그러나 로맨스와 드라마가 버무려진 <가을의 전설>과 달리 전쟁 그 자체에 집중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롤리 소위가 배정된 프랑스 지역의 최전방 참호. 신경이 곤두설 대로 서 있는 상태로 부대를 이끌고 있는 스탠호프 대위(샘 클래플린 역)와, 그런 그를 안정감 있게 보좌하는 오스본 중위(폴 베타니)가 등장하며 이들 셋이 4일 간 겪는 전쟁의 위협과 공포가 강렬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제작을 맡은 기 드 보주는 “우리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전쟁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전쟁의 그 어떤 모습도 미화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 열광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전쟁통의 혼란함과 두려움에 관한 것이었고, 이것은 대부분의 전쟁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부분이다.”라고 밝히며, 진짜 전쟁에 남겨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작품을 완성시켰다고 밝혔다.
- 영화 소개 페이지 'PRODUCTION NOTE' 中
전쟁 상황 속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았기 때문이다. 치열한 전투 장면이라든지 숨 막히는 총격전을 내세워 재미와 완성도를 높이는 대신 <덩케르크>는 전장에서 군인들이 실제로 느꼈을 법한 두려움과 살고자 한 의지를 다룸으로써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저니스 엔드>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또한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IMAX용으로 촬영한 대규모 전쟁 영상이 화면을 압도했던 <덩케르크>와 달리, <저니스 엔드>는 극히 제한된 공간(참호)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배경 덕분에 주요 인물들의 표정과 심리 변화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와 친구는 이구동성으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덩케르크>보다 재미있게 봤다'라고 평했다.
<저니스 엔드>는 토니상 수상에 빛나는 스테디셀러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스토리의 탄탄함은 이미 보장된 상태였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주연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절제와 폭발의 지점을 절묘하게 혼합한 연출 덕분에 관객들은 상영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28일 개봉을 앞둔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홍보용 마케팅으로 여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평론가들이 <저니스 엔드>에 대한 호의적이고 강렬한 감상평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큰 기대 없이 봐서 더 빠져들었던 영화' 쯤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역시 나만 그렇게 감탄하면서 영화관을 빠져나왔던 것 같지않다고 느끼는 이유다.
더 이상의 스토리에 대한 언급은 필요치 않을 듯하다. 영화 내용이 복잡해서도 아니고, 스포에 대한 저어함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매우 단순하고 정직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신선하고 매혹적인 작품이다.
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저니스 엔드>는 인류가 왜 전쟁을 없애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워 줄 만한 수작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