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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May 16. 2019

온전한 하루, 세 번 구운 스테이크.

구운 토마토도 곁들여서.



하루가 온전히 내게 주어졌다.


느즈막히 침대에 누워 눈만 꿈뻑이던 일요일 아침. 오늘 아무런 약속도 없음을 떠올리며 다시 잠을 청한다. 실은 몇 시간 전 깨어나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며 뒤척였기 때문에, 눈을 감자 금세 또 잠에 빠져든다. 역시 사도사도 부족한 건 옷이요, 자도자도 부족한 건 잠이다.


방 밖이 부산스러워 결국 늦잠도 끝난다. 부모님이 외출 준비중이시다. 갈라진 목소리로 행선지를 묻자 손주를 보러 가신단 낭랑한 답이 들려온다. 산후조리중인 딸내미도 챙겨줄 겸, 귀여운 아가도 볼 겸 해서 가까운 동생네 집에 자주 들르는 두 분이다. 웬만해선 나도 따라나서겠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오랜만에 조용한 집(위층 만 없어져도와 준다면!)에 홀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다른 데 들렀다 늦게 오신다고 했다.


드물지만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종일토록 혼자 있고 싶은 날. 그날이 그랬다.

     



마음껏 끙끙대면서 홈트레이닝을 하고, 음악을 크게 켠 채 샤워를 한다. 다 씻은 뒤에는 수건으로 몸을 가릴 필요도 없이 맨몸으로 씩씩하게(?) 방으로 들어가 속옷을 입는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성인 남성으로서는 이 순간만큼이나 자유를 느끼는 순간도 없다.



이제 휴대폰에서 멜* 음악은 끄고 거실에 있는 LP플레이어를 켠다. 평소엔 틀어놓을 일이 많지 않으므로 이 또한 한낮에 누리는 호사가 아닐 수 없다. 틈틈이 모은 재즈와 클래식 음반들을 바닥에 늘어놓고 보니 새삼 뿌듯하다. 햇볕 잘 드는 거실에서 듣는 레코드로는 역시 가사 없는 연주곡들이 매력적이다.


이쯤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또 커피다. 이왕이면 인스턴트 말고 내려서 마시는 게 음악과도 잘 어울린다.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거나 정성껏 드립하는 것까지는 좀 귀찮을 수 있는데, 이럴 때야말로 좋은 게 바로 드립백이다. 요새는 완제품 형태로 워낙 잘 나오기 때문에 포트로 물만 끓이면 맛 좋은 원두 커피를 쉽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향긋한 원두향을 느끼며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는 일이야말로 혼자 잡는 똥폼의 완성이라고나 할까. 

 


 


하루키의 에세이를 천천히 읽으며 새삼 행복을 느낀다. 별 일은 안 했어도 이리저리 움직이느라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조용히 앉아서 글을 보면 그렇게 차분해 질 수가 없다. 더욱이 그게 좋아하는 작가의 읽기 쉬운 글이라면 보다 완벽하다. 이럴 땐 한적한 곳에 위치해 인근 숲에서 새소리가 들려오는 우리집 환경(위층만 없어진다면!)이 꽤나 만족스럽다.


이때 전화벨이 울린다. 받기 전부터 짐작이 가는 '걱정어린' 벨소리에 직감적으로 발신자를 알아챈다. 화면을 보니, 역시 그녀다.


아들~ 혼자 잘 있는감? 점심 먹어야지?


다 큰 녀석이 얼마나 못 미더우면 점심 한 끼도 혼자 해결 못할까봐 점검에 나서는 엄마다. 신기하게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불현듯 배가 고파온다. 아무래도 식사를 해 먹어야 할 것 같아 조리가 쉬운 제품들부터 떠올린다. 라면이라든지 비빔면, 3분 요리 등의 간편식이 찬장에 잘 구비돼 있다. 기가 막힌 한 끼의 별미들인 건 분명하나, 그날따라 그런 것들이 끌리지 않는다. 혼자만의 온전한 시간에는 그에 걸맞는 요리도 필요하다. 




마침맞게 엄마는 냉동실 맨 아래 왼쪽 칸에 있는 스테이크 한 덩이를 알려주신다. 나 아니면 딱히 해 먹는 사람이 없어서 간혹 이렇게 덩그러니 손길을 기다리는 식재료들이 있다. 스테이크나 베이컨, 샌드위치용 햄 등 주로 내 입맛에 맞는 육류들이 그렇다.


덩그러니


전화를 끊고 냉장고에서 비닐에 꽁꽁 싸인 납작한 덩어리를 발견한다. 호주산 척아이롤 스테이크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복잡하게 조리해 먹을 것도 아닌데 두툼한 스테이크 한 덩이가 미국산이든 호주산이든 무슨 상관이랴. 한우 같은 건 어차피 냉동실에 감춰져 있을리도 없거니와, 간편히 구워서 먹기로는 차라리 수입산이 부담도 덜하고 좋다.


주방에서 약한 불을 켜고 후라이팬을 달궈놓는 동안 꽁꽁 언 스테이크는 렌지에 살짝 돌려 해동한다. 어느새 거실의 레코드가 다 돌아가 있으므로 판을 돌려 음악을 다시 튼다. 뿌우빠밤 색소폰 소리가 딱 스테이크를 구워서 먹기에 알맞은 배경음악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에 맞춰 후라이팬에 고기를 올린다. 치이이익 고기 굽는 소리가 이미 맛있다. 샐러드와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미 스테이크는 익고 있다. 아무리 혼자서 분위기를 낸다한들 거기까지는 영 귀찮아서 정직하게 스테이크만 먹기로 하고 슬쩍 집게로 고기를 뒤집는다. 그냥 굽기는 심심하니 조리 칸에서 허브맛 솔트를 찾아서 적당히 뿌린다. 이 역시 내가 안 먹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서 그런지 쉽게 찾을 수 있다. 한 통으로 평생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늘 그대로다. 

 



배는 이미 고픈데다 성미가 급해서인지 두어 번 뒤집을 만큼만 굽고는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는다. 눈대중으로 옆면을 보니 미디엄 정도는 돼 보였다. 아까 오랜만에 근력 운동도 했겠다, 단백질 보충이랍시고 나는 정직하게 고기만 먹기로 하고 스테이크를 썰어본다. 아뿔싸, 속은 더 빨갛다. 한 입 먹어보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영 아쉬워서 결국 다시 불을 켜고 스테이크를 굽는다. 지글지글- 한 번 구웠던 걸 올려놔서 이번에는 전보다 요란하지 않게 고기가 익어간다.


큰 덩어리를 가위로 한 번 더 썰어서 굽는다.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금방 다시 접시에 올려놓고는 혹시나 해서 냉장실을 한 번 열어본다. 그러면 그렇지 썰어놓은 토마토 몇 덩이가 락앤락 통에 담겨있다. 샐러드나 아스파라거스 대신 이거라도 함께 먹으면 제격이겠다 싶어 통에서 그걸 모두 꺼내 스테이크 옆에 놓는다. 칼을 들고 스테이크를 쓱쓱 써는데 왠지 고깃결이 아까랑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얼마 더 굽지도 않고 토마토에 정신이 팔려서는 스테이크가 아직도 미디엄 레어 상태다. 한 조각 더 먹어보니 역시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너무 물컹거린다.



그래서 나는 결국 스테이크 한 덩이를 세 번째로 굽기로 한다. 이번에는 명분이 하나 더 생겼다. 생 토마토 대신에 구운 토마토를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아 어차피 불을 쓰기로 한 것이다. 스테이크는 그 김에 한 번 더 올려놓는 거고. 후라이팬이 좀 퍽퍽해 보여서 오일도 추가하기로 한다. 아보카도 오일이 마침 있어서 그걸 두르고 토마토를 구워본다. 생 아보카도와는 달리 냄새가 썩 풋풋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몸에 좋을 것 같다.

    



모처럼 하루가 온전히 내게 주어진 날, 그렇게 나는 스테이크 한 덩이를 세 번이나 구워서 간신히 미디엄 상태로 익혀 먹을 수 있었다. 구운 토마토도 곁들여서. 맥주 한 잔도 하고 싶었으나 오후에 운전을 할 것 같아 그건 참았다. 뭐, 운전은 고사하고 낮잠을 자다가 TV나 봤지만.


다시 말하자면 나는 아주 여유로웠던 일요일 한낮에 스테이크를 세 번이나 구우면서 또 한 번 깨달았다. 나라는 놈은 아무리 여유를 부린다한들 결국 눈으로만 봐서는 만족스러운 스테이크를 구워내지 못한단 사실을. 한 입 두 입 먹어보고는 굽고 또 굽고, 문득 생각난 토마토까지 곁들여서야 가까스로 스스로 만족하는 소박하면서도 괜찮은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었다.


똑같이 집에서 LP음악을 켜놓고 스테이크를 굽는다 해도 단 한 번만에 자신에게 완벽한 스테이크를 만들 수 있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혹은 두 번 정도 굽더라도 그 정도에서 만족하고 질겅질겅 스테이크를 먹어치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말이다. 다만 나처럼 세 번까지는 잘 없지 않을까 싶다. 참을성에 문제가 많다거나 불안장애가 있지 않고서야 혼자 해 먹는 스테이크를 네 번 이상 구워야 만족하는 이는 더더욱 없을 테고.


애초에 느긋하지 못할 바에야 손이 몇 번 더 가더라도 스스로가 만족하는 선을 맞추는 일. 세 번 구운 스테이크를 먹으며 비로소 나는 혼자만의 온전한 하루를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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