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유머와 A급 로망의 코미디 <롱샷>

오르지 못할 나무인가, 열 번 찍을 나무인가.

by 차돌


남자들은 자기보다 능력 있는 여자는 안 좋아하잖아.



이런 말을 어중간한 남자가 내뱉으면 난리가 날 테다. 하지만 누가 봐도 진짜 능력 있는 여자가 툭 던지듯 시니컬하게 중얼거린다면? 미국의 최연소 여성 국무장관이자 유력한 대선후보인 샬럿 필드(샤를리즈 테론)가 자신의 연설문 담당 프레드 플라스키(세스 로건)에게 내뱉은 말은 그래서 관객을 설득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다. 그런 말을 들은 프레드 역시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는 그녀의 '진심'에는 의문을 가졌을지언정 능력을 의심한 적이 없는 데다, 신분 혹은 계층의 차이를 무시한 채 사랑한다고 매달린 적은 더더욱 없다.



영화 <롱샷>은 여배우 샤를리즈 테론의 화려함을 앞세워 대대적인 홍보에 나선 로맨틱 코미디다. 그녀의 상대 역을 맡은 남자 배우 세스 로건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화장실 유머'의 대가. 과연 둘의 케미가 어떠할지 짐작해 보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다. '롱샷'이라는 단어는 '거의 승산 없는 도전', '모험을 건 시도'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오르지 못할 나무' 정도로 해석된다고 한다. 대놓고 찌질해 보이는 덥수룩한 수염의 사내가, 누가 봐도 도도해 보이는 매력적인 여성과 엮이는 스토리.


총평부터 하자면 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예상했던' 측면에서의 감상. <롱샷>은 시종일관 B급 유머가 넘쳤고, 배경에 깔린 정치 이야기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생각 없이 보면 곳곳에서 박장대소할 수 있으며, 저변에 깔린 미국식 풍자개그와 위트에 공감되는 지점도 많다. 다음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 영화에서 두 남녀 주인공은 서로 스파크가 튀어 사랑에 빠진다. 외모의 차이(?)를 떠나서 둘은 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기에,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강렬한 열망이라든지 드라마틱한 계기가 필요해 보이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잘 나가는 여성에 대한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이라든지, 독특한 남성의 매력에 점차 빠져드는 지적인 여성의 로맨스 정도? 하지만 <롱샷>은 그러한 개연성과 클리셰는 과감하게 버렸다. 말하자면 B급 유머로 A급 로망의 판타지를 단순하게 풀어낸 스토리랄까.




▲가끔 돌봐주던 옆집 누나 앞에서 , ▼미 국무장관이 된 그녀 앞에 서기까지 (의 과정쯤은 훌쩍 뛰어넘는다)


자기가 속한 중견 언론사가 거대 보수 미디어 그룹에 합병되자 노발대발하며 뛰쳐나온 백수 1일 차 프레드. 절친 랜스(오셔 잭슨 주니어)가 기분을 풀어 주겠다며 데리고 간 고급 사교 모임(무슨 후원회 같은 거였다)에서 프레드는 어린 시절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한 옆집 누나 샬럿을 한 번에 알아본다. 그녀는 현재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 만한 국.무.장.관. 이들이 만나는 씬에 등장하는 보이즈 투 맨의 공연은 제작진이 가장 좋아하는 촬영 장면이었다는 후문.


그밖에 하나 더 눈여겨볼 만한 건 바로 등장인물의 복장이다. 특히 프레드의 저 후리한(?) 차림새. 최근 해외의 어느 유명 디자이너가 우리나라 '동묘시장룩'에 감탄해 화제가 됐다던데, 프레드의 윈드 브레이커가 딱 그러한 아재들의 등산복을 닮았다. 게다가 헐렁한 주머니가 툭 튀어나온 카고 바지라니. 까만 샤넬 정장을 입고 경호원까지 대동한 샬럿 앞에서 그러나 프레드는 결코 부끄럽지 않다. 부러 당당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는 친구 랜스에게 샬럿 앞에서 부끄러웠던 과거를 털어놓으며 f워드를 남발해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더할 뿐이고, 영화는 어떤 에피소드를 계기로 샬럿이 프레드의 기사에 관심을 가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러고 보니 프레드는 그저 찌질한 남자가 아니다. 급진적이고 다혈질이라 종종 문제를 일으켜서 그렇지, 글솜씨만큼은 기가 막힌 덕분에 무려 대선 후보의 연설문 담당으로 취직하는 것이다. 다만 그의 출중한 능력을 입증할 만한 장면은 그리 많지 않으므로 이 역시 개연성이나 현실성은 좀 내려놓고 봐야 한다. 이쯤 되면 영화는 로맨스를 위한 설정과 연출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다는 '웃기기 위한' 상황과 대사에 집중했다고 봐야 옳을 테다.




이 영화에서 샬럿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프레드만이 아니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그녀와 마주 보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미 합중국의 대통령. 재선을 포기할 거라는 그의 말에 샬럿은 자신을 차기 대선 주자로 지지해 줄 수 있겠냔 의사를 감추지 않을 정도로 권력 의지가 확고하다. 그런데 이후부터 지구 환경 이슈를 앞세워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그녀의 모습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순수하다고 여겨질 정도다. 게다가 그러한 면이 프레드와 가까워지는 계기이기도 하므로, <롱샷>의 배경에는 정치가 있으나 결코 치밀한 구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관객들은 '지정생존자'나 '웨스트윙'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을 테니, <롱샷>에서는 그저 뛰어난 여성 샬럿이 좌충우돌 프레드와 어울리며 어떻게 코믹한 상황이 일어나는지가 관건이다.


영화는 샬럿이 국무장관 직을 포기하고 대선 출마를 공식 발표하려는 순간에 이르러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 지점에서 어찌 보면 가장 비현실적이면서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발생하는데, 나는 그걸 보며 과연 우리 영화였다면 이런 소재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지 잠시 의문이었다. 그만큼 사회적 배경이 다르고, 코미디 장르내에서도 주로 쓰는 소재가 다르니까. 때론 그들의 개방성과 여유가 부럽기도 하고 때론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막 나가기도 하지만, 'B급'이라는 허가증 앞에 지나친 생각은 금물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다.





'약'을 즐기는 프레드를 통해 광란의 밤, 스트레스를 한껏 푸는 샬럿. 어떤 이들은 아무리 코미디지만 너무하지 않냐며 <롱샷>의 설정을 비판하기도 한다(그런 칼럼과 리뷰를 벌써 몇 개 봤다). 난 그것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도 좀 말이 안 된다 싶기는 했으니까. 단지 나는 딱히 이 영화를 보며 말이 됐으면- 하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보고 나서도 그러려니 할 뿐이라 조금은 더 너그러운 편인 듯하다.(내가 뭐라고?) 영화 내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 프레드의 절친 랜스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 ○○○!" 장면에서는 누구도 비판적이지 않고 웃음이 터졌으리라 하는 것만큼은 적어도 확실하다.


그리고 또 하나, 극 중 프레드 스타일로 영화의 한줄평을 쓴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 or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롱샷>은 그저 얼빠진 녀석의 사랑 이야기라구, Fux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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