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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따스했던 하루의 안도감

노들 강가에서의 4컷 포토 에세이

by 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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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잠시 풀리는 날이라 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부터 예감한 바였다. '아, 오늘은 안 춥겠구나'

해가 덜 깬 아침에 이 정도면, 한낮엔 따스함도 기대해 볼 만했다. 추워서 이제 못 입겠다 싶던 얇은 코트를, 올해 몇 번 입지 못한 게 아쉬워 다시 꺼내 입기를 잘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노들 강변을 산책했다. 모처럼 햇살이 강바람을 이기는 날을 놓칠 순 없었다. 앞으로 몇 달간 못 누릴 줄로만 알던 야외의 온기라 더 반가웠다. 커피를 아직 마시지 않았는데도 온 몸에 따스함이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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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이어지다 날이 뜻밖에 풀리니 아늑했다. 문득 떠올랐다. 언젠가 이 같은 기분을 날씨와 상관없이 느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 날카롭게 굴던 누군가가 의외로 느슨한 구석을 보일 때 받은 느낌이었다. 쌀쌀맞아 정이 안 가던 사람도 오래 지내다 보면 헤헤하는 걸 보게 되는데, 그럴 때 난 안도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거였다. 늘상 느슨한 나로서는 상대도 느슨할 때라야 비로소 안심하는 탓이다.


그때 구름이 잠시 해를 가렸다. 기온이 뚝 떨어질 리는 없었지만 어쩐지 초조했다. 마침내 구름이 걷히고 나서야 나는 다시 안도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추웠다 따뜻할 때와, 어둡다 밝아질 때의 감사함에 대해. 반대의 경우(따뜻하다가 추워질 때, 밝다가 어두워질 때)에 느껴지는 조급함과는 달랐다. 추운 날들 중의 따스한 하루는 어둠 속의 빛처럼 상대적으로 더 반갑고 포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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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강 사이로는 지하철이 한강철교를 건너는 중이었다.

미처 사진을 못 찍어 아쉬워하다가,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지하철이 나타나길래 나는 서울의 배차간격을 떠올리며 안심했다. 마음에 드는 구도와 타이밍을 찾아 몇 대가 지날 동안이나 사진을 찍었다.


느닷없는 따스함에 안도했던 만큼이나 꾸준히 오가는 지하철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계절 내 고만고만한 변화인 기온차에, 잠시 해를 가리다 만 구름에 유난스러웠던 것 같아 쑥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변함없이 한강 풍경을 채우는 지하철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평화로워졌나 보다.


어쨌거나 강가에서 여유를 부린 게 따사로운 날씨 덕분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깊은 강의 잔잔함도, 잦은 열차의 꾸준함도 날이 추울 땐 마음에 품을 겨를이 없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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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주황 노을이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다.

하늘도 모처럼의 충만한 온기를 붙잡아 두고 싶은 듯했다. 바람조차 안 불어 고요한 잔디밭을 나란히 걷는 이들의 발걸음도 느릿느릿했다.


느닷없이 따스했던 하루에 난 그렇게 안도감을 느꼈다. 이 기분을 잘 기억해 겨울을 견디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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