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돌 Dec 03. 2019

골목에 살아 좋은 점

연남동 골목길 4컷 포토에세이




  골목 어귀에 살게 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맛집과 술집이 옹기종기 모인 번화가 근처는 게다가 처음이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집 밖을 나서면 낯선 이들의 모습이 흔하다. 얼굴이 붉은 남녀가 다정하게 길을 걷거나 어딘가를 찾아 지도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이사 온 초반에는 그들처럼 모든 게 새로워서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보면 애초의 행선지와는 상관없는 방향이거나 막다른 골목이었으나, 어떻게든 길은 이어져 있게 마련이었다.


  사는 데가 그리 외진 곳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큰길을 골라 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되도록이면 골목 안을 헤쳐 지나는 길을 택한다. 추워지기 전에는 더 그렇게 작은 골목들을 골라서 다녔다. 그럼에도 한 달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동네 지리를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타고난 생체 GPS의 성능이 썩 좋지 않을뿐더러, 골목골목이 꽤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탓이다.         



   


  골목을 걷는 건 아파트나 빌라촌을 거닐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멀끔하되 천편일률적인 계획 단지들과는 달리 골목 안 주택들은 개성이 살아있다. 저마다 다른 모양과 구조의 집들이 용케도 다닥다닥 붙은 모습을 보면 때때로 감탄이 나온다. 차 한 대는 지나고도 남을 만큼 곧게 뻗은 길 사이로 완전히 다른 건물이 나란히 있는 것도 신기하다.


  같은 골목인데도 대문이 다르고, 현관이 다르고, 층층이 다르고, 창문이 다르다. 집집마다 쓰레기봉투가 나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자전거가 묶여 있기도 하고 오토바이가 매여 있기도 한다. 저쪽엔 옥탑이 있는가 하면 이쪽엔 반지층 창이 나 있다. 이렇게 모두가 다르게 생겨서 각자의 사연도 다를 거라 기대되는 곳이 바로 골목길의 집들이다.

   




  골목의 풍경은 낮과 밤이 또 다르다. 

주택만이 아니라 상점들도 많아서 그렇다. 오전엔 문을 닫고 저녁에만 여는 술집, 아침은 한산한데 낮에는 손님이 들끓는 식당, 일요일에 쉬는 가게, 월요일에 쉬는 가게. 생활 리듬이 완전히 다른 상점들로 채워진 골목길은 알록달록하고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아침저녁으로 같은 가게를 지났는데, 아침에 기대했던 느낌이 저녁에 고스란히 있어 괜히 반가웠다. 마침 가게 이름도 깊이 빠져든 드라마의 제목을 닮아서 기억에 더 남았다. 안주 일체와 주류 일체를 파는 곳이라 누군가 내 집을 찾아오면 함께 들르리라 생각했다. 이러한 기대 또한 알록달록한 골목 어귀에 살아서 얻는 설렘 가운데 하나다.





  연말이라 그런지 요즘 골목 안에는 공사가 잦다. '내가 이사 왔다고 동네가 아주 작정하고 손님맞이를 하는 건가'라는 말도 안 되는 자뻑(?)에 취했을 정도다. 상하수도를 정비한다고 도로가 뒤집히는가 하면, 어떤 건물은 금세 새단장을 하고 또 어떤 건물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좁은 골목에 온갖 건축 자재며 설비들이 드나드느라 시끄러운데도 다들 잘 지내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용하단 생각마저 든다.


  며칠 전에는 완전히 무너진 건물의 적나라한 뼈대와 철골을 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가림막 사이로 문이며 창이 보였던 것 같은데 하루 만에 그렇게 돼 있는 걸 보니 아찔했다. 노후된 집이었는지, 건물주가 새로 들어선 상가인지 나로서는 당최 알 수가 없다. 다만 인근에 널어놓은 내 빨래에까지 시멘트 분진이 날아가 들러붙진 않았을지 짐작해 볼 뿐.


  오늘 밤에도 나는 골목길로 귀가할 것이다. 

어느새 익숙해진 코스 말고 그 옆에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볼까 한다. 괜히 헤맬 수도 있겠지만, 길 찾는 재미 말고도 골목에 살아 좋은 점 무엇을 또 추가할지 모를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느닷없이 따스했던 하루의 안도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