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셋, 휴직하고 떠난 제주에서의 서른 날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中
출발일 아침, 시간 여유가 있던 덕에 다시 한 번 여행 가방을 체크하고 좋아하는 여행 에세이의 글귀도 되새겨 봤다. 내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가 제주가 아닌 국내외 그 어떤 곳이라 했을지라도 출발일의 마음가짐은 같았으리라 생각한다. 어딜 가느냐에 따라 가방의 형태라든지 탑승할 차량, 비행기와 같은 수단의 차이는 생겼을지언정 '여행' 을 간다는 행위의 본질은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변하지 않는 상황들을 뒤로한 채, 그 어떠한 목적이나 성과지향에 대한 욕심도 없이 그저 일상에서 한 달을 벗어나기로 한 결심은 그토록 명확했다.
그러나 출발한 지 오래지 않아 여행도 이윽고 내가 당면한 '현실' 로 이끌려 옴에 따라 나는 추상적인 사유는 커녕 공항으로 이동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비행기 탑승 전 넉넉한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시간 계산을 했지만, 지하철-공항버스로 이어지는 교통수단 각각의 배차시간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던 탓에 생각보다 이동에 시간이 더 걸렸던 것이다. 환승이라는 게 원래, 앞에서 한 타임이 늦었다고 해서 반드시 환승 후 다음 교통편에서도 딱 한 타임만 늦어지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집을 나선 후 빠트린 물건이 생각나서 다시 돌아갔다 나오느라 애초에 출발 자체가 10분은 지체됐던 상황이라, 결국 공항 도착 시각은 계획했던 것보다 50분 정도는 늦어져 있었다.
항공권 발권을 한 뒤, 롯데리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달아올랐던 몸을 식혔다. 원래 시간에 그리 철두철미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편인데, 여행도 딱 그렇게 나서고 보니 배시시 웃음이 다 나왔다. '나는 나인건가' 싶은 마음도 있었고, 앞으로의 여행에서는 시간관리에 보다 철저해야겠다는 다짐도 있던 기억이다. 이와는 별개로, 어쩐지 장기여행에 꽤나 어울리는 출발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비행기를 놓치지만 않으면 될 일이었고, 그럼에도 계획이 틀어질까봐 초조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도 보고 공항버스가 제 시간에 오지 않자 버스회사에 전화문의도 했던 나였다. 대단찮은 에피소드였을 지라도, 이미 여행은 순간순간의 과정이자 잠시 후의 결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고 있었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언제부터인가 뇌리에 박혀있는, '여행' 을 정의하는 나의 가치관으로 그렇게 제주 여행의 출발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나였다.
여행의 출발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역시 공항을 빼놓을 수 없다.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도 비슷한 맥락에서 논할 수는 있겠으나, 공항의 특별함을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출발지와 도착지(혹은 경유지)라는 공간성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가득한 비행기라는 이동수단이 지닌 특수성으로 인해 공항은 그 자체로 여행을 환기시킨다. 비행기를 타는 건 주로 해외에 나갈 때이므로, 이국적인 곳으로 떠난다는 설렘으로 가득한 여행객들이 많다보니 그 낭만이 더해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제주여행은 공항으로 가기 때문에 늘 더욱 설렌다. 인천공항에서 출항한다면 그 설렘이 더해질 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 해서 김포공항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제주여행에 있어서는 김포공항이야말로 하나의 '상징' 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근래의 저가항공 활성화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도 있겠으나,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대표적인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으니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까지는 해외여행의 설렘까지도 모두 김포공항이 담당했을 터이다.
공항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흔히 들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어서다. 아무리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일지라도 공항이 일상의 공간일 수는 없다. 주위에 몇 군데 씩이나 위치하고 있지는 않은데다, 행여 집에서 가까울 지라도 그곳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요금을 써야하므로 공항은 일상을 벗어난 영역에 속해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제주여행의 출발일, 내가 처음으로 '떠난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은 다름아닌 공항 내 횡단보도에서였다.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씩 끌고있는 캐리어들이 아스파트 위 하얀선들을 수직으로 가르는 풍경에서, 들려오는건 '드르륵' 거리는 바퀴소리 뿐이었지만 이마저도 공항에서는 여행의 전주곡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한 여성이 눈에 띄는 핫핑크색의 캐리어를 끌고 내 옆을 스쳐가는 순간, 다른 모든 캐리어들이 흑백으로 보이고 핫핑크의 컬러만이 눈에 들어오는 영화적인 포커싱 현상도 함께 겪었다.
그렇다. 캐리어 가방을 보면서 낯설고 특별한 풍경을 접한 듯했던 김포공항 횡단보도에서부터, 나는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여행에의 기대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혼자 온 남자 탑승객에게 흔히 권해지는, 다리를 더 뻗을 수 있으나 비상 시 승객들의 탈출을 도울 의무도 부여되는 날개 근처 비상구 좌석이 나에게도 권유됐다. 흔쾌히 응했다. 다소 쌀쌀맞은 항공사 직원의 무표정한 제의였음에도, 제주도에서의 한 달 여행을 앞둔 나로서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한창 스트레스를 받았던 무렵의 나였다면 금세 표정이 굳거나 다른 데 앉겠다고 대답했을테지-' 라는 건 한참 후에 당시를 돌아볼 때서야 들었던 생각이다. 정말로 그 무렵에는 불만이 거의 없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마음 상태였던 것이다.
해서, 50여 분 남짓의 비행내내 나는 제주항공 로고의 미소와 배경의 파란 하늘을 더 어우러지게 담아보고자 작은 창가에서 연신 아이폰 카메라를 찰칵거렸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비행기를 처음 타는 사람으로 보였거나, 너무나 감상적이고 들떠있는 SNS 중독자라서 사진찍기를 멈출 수 없는 이로 보였을테다. 내게서 풍기는 이미지를 고려한다면 전자 쪽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랬거나 말거나, 푸른 하늘이나 아득한 지상을 그저 바라보지만 않고 계속해서 무언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비행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LA로 가는 11시간 동안도 그럴 자신이 있겠냐고 묻는다면 단호히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런 상황이 닥치면 또 그 나름대로 긴 호흡을 지닌 반복적인 무언가를 할테니 결국 비행에 임하는 내 자세가 달라질 거라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제주임을 제대로 확인했던 건 바다를 통해서도, 기장의 안내방송을 통해서도 아니었다. 착륙 후의 굉음이 사라진 비행기가 천천히 제주공항 내로 진입할 때였다. 지루할 정도로 내다본 창가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확실히 달랐다. 멀리 솟아있는 한라산이, 비로소 여기가 제주라는 강한 인상을 남겨줬다. 계속 봐오던 제주항공 로고의 배경색도 감귤에 더 가까운 오렌지로 빛나보였다.
제주임을 완전히 인식한 건 공항 게이트를 나와서 야자수들을 봤을 때다. 마침 한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그 아래를 걷는 모습이 함께 눈에 들어왔는데, 아마 여행객이었겠지만 당시의 내게는 마치 그들이 "혼저옵서예" 하며 나를 맞아준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고보면 꽤나 들떠있었고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아닌 렌터카 인수였다. 사실 전화예약만 해놓은 상태였기에(https://brunch.co.kr/@hyuksnote/24) 마음 한 켠에 약간의 불안함이 없지는 않았다. 아무리 대기업이라 한들 개인 고객에게 댈 수 있는 온갖 핑계거리와 지독한 논리가 많은 세상이다. 꼭 괘씸해서만이 아니라 불편함은 결국 개개인의 몫이 되기 때문에 기업과 개인의 거래에는 평등보다는 차등과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라고 다소 딱딱한 인식을 밝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출발일의 기분좋은 과정에서는 크게 품고있던 생각은 아니었다. 공항에서 렌터카 업체까지 데려다주는 셔틀버스가 알록달록 잘 꾸며져 있어 산뜻했던 그런 순간만 있었다.
다행히 렌터카는 잘 준비돼 있었다. 시동이 잘 걸렸고, 블루투스로 휴대폰과 미디어 연결도 원활함을 확인한 후 약속된 금액을 결제하고 나는 바로 차키를 받았다. 여행 도중에 알게 된, 워셔액이 떨어졌다는 사실과 에어컨 가스가 충분치 않은지 바람 세기에 비해 냉기가 덜했던 실내 상태까지는 차량 인수 당시에 챙기기 힘들었던 사항들이다. 게다가 하필 내 렌터카는 여행의 중반 무렵 차량 종합검사 기간 종료일이 되어 업체에서 본인들이 과태료를 물지 않도록 고객인 내게 정비소에 들려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으니(이에 대해서는 후에 검사소에 들른 날의 여행기에서 다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어찌보면 렌터카 인수는 완벽했다고 볼 수는 없겠다.
다시 출발일로 돌아가 보면, 나는 앞으로 한 달 간 나의 발이 되어줄 흰색 모닝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10년 넘는 운전경력에도 경차를 몰아봤던 기억은 나지를 않는데, 타보니 왜 다들 경차가 실용적이라고 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제주 시내를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으로 확 끼어드는 차량 때문에 잠시 '중형차였어도 이랬을까'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제주는 현지인들 뿐 아니라 많은 렌터카 고객들로 인해 더욱 방어운전에 유의를 기울여야 함을 미리 주지하고 있었다. 이에 너그럽게 양보운전을 함으로써 경차의 실용성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었다.
나의 출발일이 곧 도착일이었던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의 한 달 숙소는 예상보다도 한적한 곳에 있었다. 비슷한 모양의 3층 건물이 여러동 붙어 있는, 중간산 내륙으로 이어진 1차선 도로 옆에 위치한 임대형 주거&여행자 숙소 타운이었다. 이미 늦은 오후라 해가 상당히 기울어 있었고, 일단 숙소와 호스트에 익숙해져야 겠기에 도착 후에 나는 어디 들를 생각보다는 조용히 쉬면서 지낼 요량이었다.
한적한 위치와 낡지 않은 시설이 출발 전 기대와 일치했다면, 또 다른 두 가지는 예상과 달랐다. 다인실을 개인실처럼 쓸 수 있으리라던 기대와 달리 내게 제공된 공간은 작은 개인실이었다는 점과, 사진으로 본 인상과는 약간 달랐던 호스트의 이미지가 그러했다. 다인실은 호스트와 같은 3층을 사용해야 하는데, 개인실은 한 층 아래에 따로 있는 방이었기에 나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딱히 호스트 분이 거짓 정보를 줬다거나 내가 잘못 알았다기 보다는, 정황상 그 방이 내 방인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또한 호스트 분의 인상이 안 좋은 쪽으로 달랐던 것도 아니었다. 손님맞이에 능숙한 하우스의 주인이라기 보다는, 정말로 본인의 공간을 최대한 서로가 편하게 게스트에게 제공하려는 적당한 친절함을 지닌 분이셨다. 1층은 최소 일주일 단위의 여행객에게 독채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3층 주택이 활용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고, 낯선 사람에게 전혀 거리낌이 없는 그녀의 6살 딸아이가 던지는 순진한 질문이 그러한 숙소에 대한 설명보다 많았다.
그렇게 출발이 곧 도착이 되면서, 은근한 피로가 몰려왔다. 시차도 없고 언어도 같은 제주지만, 외따로 떨어진 섬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앞으로 한 달을 지낼 각오를 본격적으로 해서였는지 환경변화에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들어갔던 것 같다. 그래서 인근의 식당에서 첫 외식으로 회국수를 맛있게 먹고 숙소로 돌아온 그날 저녁에는 차분하게 그때까지의 상황과 사진들을 블로그에 정리하는 것으로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 출발했다.
그리고 이렇게 '출발' 을 다양하게 돌아보며, 네이버 어학사전에서 departure 를 혹시나 검색해 보니 딱 기대했던 번역의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떠남, 출발 뿐만 아니라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까지. 일상 뿐만이 아닌 '정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새롭다. 그랬다, 제주 한달살기를 출발하며, 나는 그때까지의 나를 규정하고 있던 어떠한 '정도'에서도 비껴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