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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Aug 30. 2017

제주 한달살기, Day1 : 비 오는 날의 숲과 카페

봄비로 시작한 제주 여행 첫날의 동백숲과 카페 산책.

# 여행 첫날, 비 오는 제주 
# 산책코스, 동백동산
# 세화 해변, 카페공작소




거짓말처럼 멀리서 닭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함께였다. 제주에서 보낼 한 달을 맞이하는 첫 번째 아침이었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작은 옷걸이와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있는 작은 방 안에 내 짐과 옷들이 펼쳐져 있었다. 머리맡에는 어젯밤 읽다 만 제주여행 가이드북이 엎드려 있었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자 기분 좋은 뻐근함이 전해졌다. 마음 구석구석으로는 앞으로의 한 달에 대한 기대가 퍼져왔다.   





어떠한 형식이 느껴지지 않는 아침 식사였다. 아직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호스트 아주머니가 딸애의 유치원 등원 준비로 바쁜 와중에 아침상 그대로를 나누어 주는 방식에 신선함을 느꼈다. 여행지에서 게스트는 보통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정해진 조식을 제공받는데, 이곳은 그냥 '함께하는 생활공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한 달간 세 들어 생활할 삼춘(제주에서 성인 남자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봤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제주에서 비 오는 날씨는 처음인 듯했다. 주로 날이 좋은 4,5월에 여행했기 때문이리라. 역시 5월이었기에 여행 첫날부터 비가 내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당황스러운 날씨는 아니었다. 내게는 주어진 시간만큼의 여유가 넉넉했다. 오히려 일찍부터 비를 봐서 좋다고도 여겨졌다. 한 달 내내 비가 올 리도 없거니와, 한 달 내내 맑은 날씨의 제주를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인근의 '동백동산' 이 좋다고 호스트 아주머니가 추천해 주셨다. 그리 크지 않기에 걸어서 한 바퀴를 다 둘러보기에 좋고, 무엇보다 숙소에서 가까이 위치한 데다 한적하게 산책하기에는 최고라고 하셨다. 마침 우산 없이 다니기에도 부담 없을 만큼의 보슬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큰 비로 이어질 거라는 예감도 들지 않았다. 아침 숲이 비에 살짝 젖어있다면 아주 상쾌하고 풀냄새가 진해서 더 좋을 것 같았다. 바로 정했다. 동백동산으로 향했다.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비 오는 평일 오전의 숲은 정말 아무도 없이 한적했다. 초입부터 동백숲이 울창하여 산골 깊은 곳이었다면 약간 으스스 하달 수도 있을 만큼 침침하고 고요했지만, 그날의 동백동산은 밝고 환하게만 느껴졌다. 방안에 형광등 불빛이 가득할 때보다는 오로지 스탠드 조명만 켜놓은 상태의 분위기가 훨씬 은은하고 오롯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비구름 아래에서의 동백숲은 밝은 날의 산책보다 몰입하여 걸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핀 조명이 노오랗게 비춰지는 연극 같은 느낌이었다.



얇은 윈드브레이커에 달린 모자만 쓰고 걸어도 충분할 만큼 빗방울은 가늘었다. 그마저도 동백나무 잎들이 가려주었기 때문에 준비해 간 우산은 한 번도 펼치지 않고 백팩에 넣었다. 예상했던 대로 적당한 비가 땅을 촉촉이 적셔놓은 상태였고, 풀잎들은 새벽 이슬을 머금은 듯 싱그러웠다. 산책로 중간중간에는 굵은 나무뿌리들이 땅 밖에 드러나 있었다. 보디빌더의 기름칠한 근육처럼 건장해 보였다. 


처음의 신선함과 낯섦이 가시고 숲길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무래도 여행을 하기 전까지의 고민들이 여전했다. 따지고 보면 나를 둘러싼 많은 일들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훌쩍 제주로 도망 온 셈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나는 새로움을 향한 기대를 망치고 싶지 않아 '도망'이라는 말을 잘 떠올리지 않았으나, 어쩐 일이지 여행 첫날 동백동산을 산책하면서는 자연스레 이 단어를 곱씹었다. 다녀와서도 그대로일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난다는 점에서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는 '도망'이다. 다만 숨기 위한 피난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고난이라면 기꺼이 어디로든 도망 다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아래로는 돌 밟는 소리, 위로는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 사이로 숲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새 들끓던 생각을 멈추고 숲의 분위기에 온전히 취한 상태였다. 나만의 생각에만 골몰하지 않기 위해 자연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붐빌 때 산책이 더없이 좋은 이유는 이렇게 걸으면서 잡념을 줄이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어서다. 이때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현무암 돌들이 자박자박 침착하게 부대끼는 소리와 동박새가 휘리리리 낭랑하게 지저귀는 소리라면 그야말로 최고의 산책이라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본다. 사람들의 구둣발 소리라든지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걸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던 환희를 동백동산 숲 속에서 맛보았다.


앞으로 제주에서 혼자 걸을 일이 많을 터였다. 더는 일상에 얽힌 생각들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제주의 자연을 누리며 몸과 마음을 다스려 보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비 오던 날의 동백동산은 인상적인 출발이었다. 이후로도 올레길을 걷거나 오름에 오르며 좋은 시간들을 보냈으나 동백동산을 산책했던 느낌과는 또 달랐다. 어찌 보면 초심자의 행운이었달까, 아무 준비 없이 걸었던 그날의 산책은 그만큼 한 달 중에서도 손꼽을 만큼 훌륭했다는 말이다. 두어 시간을 걸었을 뿐인데, 일상에서는 스무 시간을 고민해도 얻기 힘들었던 마음의 평화를 안고 여행을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성찰과 평화의 시간도 점심 무렵의 허기보다 현실적일 수는 없었다. 차에 앉아 휴대폰으로 인근의 맛집을 검색해 금세 가까운 식당을 골랐다. 문득 스마트폰이 있기 전의 여행은 어떠했는지를 떠올려봤다. 아무래도 더 계획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던 기억이었다. 그때그때 코스를 변경해 가며 맛집까지 챙기는 즉흥여행이 가능해진 일 또한 스마트폰 덕에 얻은 혜택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혼자 먹기에는 황송할 정도의 정식요리가 그리 비싸지 않았다. 고등어구이와 돔베고기를 중심으로 한 찬들은 제주다운 음식이면서 일반 가정식으로도 볼 수 있는 정갈한 한 끼였다. 비 오는 평일의 늦은 점심이라 그런지 식당에는 역시 사람이 많지 않았다. 혼자 주문을 하면서도 불편한 마음 없이 식사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왜 다시 찾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여행 기간을 통틀어 훌륭한 식당 중 하나인 '선흘곶'이었다.

 



계획한 여행코스가 아니었던 만큼, 이후로도 정해진 동선은 없었다. 단지 여행 초반에는 숙소 인근부터 시작해서 제주 동북쪽을 찬찬히 둘러보려는 큰 틀에서의 계획뿐이었다. 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오후는 실내에서 머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마침 가까이에 '세계자연유산센터' 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리로 갔다. 제주의 자연환경을 다룬 전시관을 둘러보며 제주에 대한 기본상식을 채울 요량이었다. 한편 전시관 옆쪽으로는 세계 자연유산이자 제주의 대표 오름 중 하나인 '거문오름' 입구도 있었으나, 사전예약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쉽지는 않았다. 맑은 날을 골라 예약하고 다시 찾으면 될 일이었다.


길지 않았던 전시 관람 후에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세계자연유산센터 내에서 정해진 시간마다 상영하는 20분짜리 4D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이었다. 모처럼 오전 내 걷고 나니 피곤하기도 했고 점심식사 후 나른한 졸음이 몰려오던 참이라 달콤한 낮잠이었다. 천천히 일어나 센터로 다시 들어가서 상영관에 입장했다. 나눠주는 입체안경을 쓰고 아이들 틈에서 관람했다. 제주 설화에 얽힌 내용을 꼬마 아이의 모험을 통해 그려낸 짧은 홍보영화였다. 이렇듯 여행초에 내게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고, 어떠한 의무감이나 조급함도 없이 몸이 허락하는 만큼,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모처럼 그렇게 해 보는 여행이라 정말 편했다.





여유가 많은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정처 없는 여행을 바라지는 않았다. 출발 전에 기록한 '가보고 싶은 곳'들의 목록이 있었고 이 중에서도 여행을 기록하는 시간을 보내고자 찾아놓은 카페들이 몇 군데 있었다. 늦은 오후부터는 이들 중 한 곳에 머물며 글과 사진을 정리하기로 했다. 여행의 준비와 출발에 이르던 그때까지의 일주일 과정을 조금이라도 더 기록해 놓고 싶었다. 이를 위한 장소도 역시 멀지 않은 곳에서 찾으려다 보니 세화 해변의 '카페 공작소' 가 끌렸다. 워낙에 유명한 곳이라 일찍이 리스트에 넣었던 명소들 중 하나였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하늘을 닮았다. 비 오는 날은 그에 맞게 흐린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경계를 이루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역시 조화로운 느낌을 빚어내고 있었다. 카페 공작소 앞 도로 건너로 쭉 이어진 낮은 둑길 위에는 테이블과 의자와 꽃병이 항상 놓여있다. 평범한 소품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카페 공작소를 찾는데,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커플과 여자 손님들 가운데 청년 혼자 자리를 잡은 건 나뿐이었다. 한참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셀카에 여념이 없는 여성들이라든지 삼각대에 고정시켜 놓은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맞댄 커플들이 많아서 어쩐지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혼자 여행을 시작한 이상 그런 일 하나하나에 마음 쓸 겨를은 없었지만, 장소가 장소였던지라 주위를 의식했던 것 같다. 다행히 "저기, 죄송하지만 사진에 방해가 되니 잠시 비켜주시겠어요?"와 같이 무서운 말을 꺼낸 사람은 없었다.



창 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 카페라떼 한 잔을 오래도록 마셨다. 마침 내가 있던 곳이 예쁜 창가 쪽이라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근처에 다가왔지만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분위기에 적응을 한 데다 여행기를 쓰기 시작하며 기분이 매우 좋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설령 촬영을 위해 자리를 바꿔달라고 해도 기꺼이 응했을 것 같다. 


개설한 지 오래지 않은 개인 블로그에 제주 여행에 대한 포스팅을 올리기 시작했다. 에버노트에 저장했다가 정리된 여행기를 나중에 한꺼번에 올릴까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몰아서 쓰는 번거로움에 대한 걱정뿐 아니라 여행 도중에 여행을 기록하느라 기록할 여행 자체가 줄어드는 '시간'의 한계가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시간이 될 때마다 글과 사진을 기록하며 다니는 방식을 택했다. 아무리 봐도 이 또한 한 달 여행의 과정이라고 여겨졌다. 제주에서 더 많은 곳을 다니기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더 좋은 글과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여행이 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첫날부터 꽤나 성공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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