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이틀 제주 스쿠터 여행 #1

가고 싶으면 가자

by 차돌




며칠 전부터 제주가 당겼다. 올 게 온 거다.


제주도 갈 건데 같이 갈래?


타이밍도 기가 막힌 녀석, 내 친구 털보가 화요일 밤 느닷없이 물었다. 당연히 마음이 동했으나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아쉬움을 삼켰다. 하지만 난 결국 다음날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목요일 오후 출발, 일요일 새벽 복귀 일정 - 토요일 하루만 친구 두 명 털보, 진보와의 스쿠터 동행 예정으로.


854B9A6D-0410-4D7C-BAB4-BA1ED213AA6B_1_102_o.jpeg 내 친구 털보




자 이제 목, 금 이틀 혼자 묵을 숙소 정하기. 이번 일정은 짧으니 숙소에 돈 쓰지 말아 보자 > 그래, 더 늙기 전에 게하에서 한 번 묵어보자. 에어비앤비 검색, 평점 좋은 제주 시내 게하를 골라 연박으로 바로 예약. 6인실에 1층 펍과 6층 루프탑. OK 정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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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점심까지 원고를 마감하고 헬스장으로 직행. 며칠 잘 먹고 올 텐데 하루라도 운동해 놓고 가야겠다 싶어 후딱 땀 흘리고 와서 짐을 마저 챙겼다. 스쿠터 타고 다닐 테니 백팩 하나에 다 들어가도록 단출하게. 코디는 겉옷에 맞춰 최대한 껴 입기. 긴팔 티셔츠 위 얇은 후디 위 플리스 재킷 위 가죽 재킷. 라이딩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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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행기의 출발 시각은 17시 무렵. 홍대역에서 김포공항까지 20분이면 되니 여유로웠다. 헬스도 했겠다, 가뿐한 마음으로 출발! 공항에 금방 도착하여 발권하고 잠바 주스에서 프로틴 한 잔 하며 유유자적. 수하물 맡길 게 없으니 확실히 빠르고 편했다. 제주에 작은 캐리어조차 없이 급히 간 건 출장 이후 오랜만이었다.


F5A3341D-3A9D-4176-88B0-F1576DD720CC.heic 늘 좋은 풍경




참, 전날 밤 생각이 나서 넷플릭스 '먹보와 털보'를 보니 그들이 갔던 시기가 딱 이 무렵이었다. 코스도 얼추 내가 머릿속에 그린 거랑 비슷했고. 숙소를 정한 동문시장 근처에 먹보, 털보가 제주에서 처음으로 먹방한 국밥집이 마침 있었다. 공항에서 버스 타고 동문시장으로 가서 바로 '광명식당'을 찾아갔다.


77BAFE93-4A4C-4436-98C6-111595AA0C6A.heic 비처럼 먹고 싶었거늘


아차, 국밥집은 원래 일찍 닫나? 7시가 안 됐는데 가게 마감 중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장통을 돌아보니까 벌써 문 닫은 곳들이 많았다. 제주의 밤은 역시 짧은가. 골목을 뒤지다 허름한 국밥집 하나를 발견, 딱 느낌이 왔는데 역시나였다. 고기 국밥이 예술이었다. 초고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혀와 입천장이 얼얼하다(* 다음날 확인하니 혀 데었다. 이틀 내내 먹을 때마다 고생했다). 그만큼 허겁지겁 한 그릇 뚝딱.


269B0595-3A06-4903-93B0-814A67423BB4_1_102_o.jpeg 맛집 근처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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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까지는 멀지 않았다. 바다로 뻗어있을 근사한 하천을 따라 러닝화의 쿠션감 만끽하며 룰루랄라 걸어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 미리 안내받은 비대면 체크인 방식으로 5층 방에 올라가 보니 6인실에 나 혼자였다. 기대...를 딱히 한 건 없고, 목요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루프탑에 올라가 봐도 아무도 없었다. 1층 펍에만 여행객 몇 명이 있었을 뿐. 한라산 소주에 토닉워터를 섞은 칵테일 한 잔만 깔끔하게 마시고 근처를 둘러볼 겸 산책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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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혼술 한 잔


배도 부르겠다 맥주보다는 와인이 마시고 싶어 편의점에서 작은 병 하날 샀다. 비스킷 안주 하나랑. 숙소 루프탑에 다시 올라가 보니 이미 맥주 몇 캔을 마신 아재 한 분이 계셨다. 그래, 오늘은 나 혼자가 낫겠다. 병 주둥이로 마시는 와인도 제법 괜찮다 싶어 홀짝거리고 있는데 아재가 말을 걸어오셨다. 각오는 했지만 급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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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깨진 와인의 평화


우도에 사는 분인데 휴일에 심심해서 쉬러 왔다 했다. 사는 곳은? 나이는? 군대는? 고등학교는? 전형적인 접점 찾기식 질문이 쏟아졌는데 취해 있지 않던 나로서는 솔직히 반갑지 않았다. 사람 좋아 보이긴 했으나 아무래도 코시국인데 마스크 벗고 너무 들이대길래 부담스러웠다. 침묵을 깨고 싶던지 갑자기 비트박스까지 선보이는 거였다. 침이 너무 튀어 살짝 화가 나려고 했다. 괜히 부주의하다가 로나코 두 번째로 걸리고 싶진 않았다. 대충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방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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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일 때가 차라리 좋았다


방으로 돌아온 얼마 뒤였다. 띡, 띡, 띠딕, 띠리릭. 누군가 들어왔다. 설마 아까 그분은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방에 들어선 인물은 훤칠한 외국인 한 명이었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눴다. 독일인이랬다. 친구 넷과 함께 왔는데 자기가 먼저 방 확인하러 왔고, 밖에서 1시간 정도 놀다가 늦게 들어와도 괜찮겠냐고 물어왔다. Sure, Why not?


이 여행기의 초고는 그 무렵 완성되었다. 1시간 뒤에 그들은 시끌벅적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노트북 하던 내게 다들 주먹 인사를 건네며 간단히 통성명. 오우 여기가 정녕 한국인가. 아무튼 그들은 넷이고 난 혼자이니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하는데 내가 낄 자린 없었다. 다른 무리와 옆방에서 함께였는지 루프탑에서였는지 새벽 2~3시까지 음악 틀어놓고 시끄럽게들 노는 통에 잠을 설쳤다. 그러다 와서 잠든 한 녀석은 기침까지 해대길래 영 찝찝했다. 에어비앤비에 들어가 보니 오전 11시까지 예약 취소가 가능하다길래 이틀째 숙박은 취소했다. 지쟈스, 첫날은 그렇게 황망히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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