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진작가 김영갑의 책을 그의 정원에서 읽다
# 사진작가 김영갑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갤러리 두모악, 동박새 지저귀는 정원
# 길가의 강아지들, 효리네 민박
# 카페 제이아일랜드, 청귤 주스
# 가시식당, 제주 두루치기
오직 제주를 사랑하여 제주의 풍경만을 죽는 날까지 사진에 담으려 노력한 사람. 괴롭고 이른 죽음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래서 더욱 살아있는 동안의 순수한 열정이 빛났던 사진작가 김영갑. 그의 자서전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는 제목과 표지 사진에 이끌려 사놓고는 한동안 펼치지 못한 책이었다. 이 책만큼은 반드시 제주에서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결국 작가의 숨결이 깃든 공간에 앉아 오래도록 그의 저서를 읽는 감동을 누릴 수 있었다. 김영갑이 죽기 전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갤러리의 정원에서, 따스한 햇살이 초록의 나뭇잎에 부서져 흩어진 그늘 아래 동박새 소리는 낭랑했다. 작가의 담담한 글들이 때로는 음성이 되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제주의 남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내륙 중산간 지대를 지나 삼달리 숲길에서 어렵지 않게 김영갑 갤러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숙소를 나서서 곧장 향했으니 제법 이른 시각이었다. 아침의 갤러리도 좋을 테지만, 어쩐지 작가를 너무 모른 채 갤러리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에 입구에 들어서기가 망설여졌다. 조금만 더 가서 삼달 교차로를 지나면 바닷가에 인접한 도로가 나오므로 분명 카페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갤러리 관람은 오후를 기약하고 차를 몰아 해안으로 나왔다.
성산읍 해안도로를 천천히 달리며 적당한 카페를 찾았다. 하얀 건물에 통유리가 환한 곳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제이아일랜드' 라는 간판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제주도 공식 카페인 듯한 이름과 장식이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선택에 만족했다. 환한 실내는 아기자기한 가구며 소품들로 잘 꾸며져 있었고, 전체적으로 깔끔한 화이트톤 인테리어는 포토 스튜디오를 연상케 했다. 통유리 너머로는 제주 바다가 시원하게 보여 탁 트인 전망이었으며, 중앙홀 주위로는 2층 공간까지 시원하게 확장돼 있어 내부 공간이 더 넓게 느껴지는 카페였다. 생긴 지 오래지 않았는지 모든 것들이 깨끗했고 손님이 별로 없는 시각이라 더 쾌적한 분위기였다.
주문을 하고,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을 꺼내 그전까지 작업 중이던 여행기를 정리하거나 잠시 멈추어 바다를 바라보며 오전 카페에서의 여유를 즐겼다.
청귤(풋귤) 주스를 마셨다. 커피는 이미 숙소에서 한 잔 마시고 나온 참이라 청량한 음료를 택했고 그 선택은 역시 옳았다. 직접 담갔다는 청이 듬뿍 들어간 주스라서 보기에도 좋고 그만큼 맛있었다. 시원하게 마시며 앞서 방문했던 제주의 다른 카페들을 잠시 돌아봤다.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 있는 이 곳 역시 나와 같은 첫 방문자들이 늘어나면서 충분히 입소문을 탈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관건은 역시나 '변하지 않을 수 있느냐' 일 터였다. 유지해야만 하는 것들과 변화시켜야 하는 것들을 잘 나누어 적용하는 일이야말로 카페와 인간관계 모두에 있어 중요한 태도가 아닐까.
김영갑 갤러리에 대해 잠시 검색해 보다가 노트북을 덮었다. 너무 많은 정보와 감상은 오히려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드디어 펼쳐봤다. 양장본이 더 어울리는 흔치 않은 책이라는 생각이었다. 매끈한 책장을 넘기며 간간이 인쇄돼 있는 작가의 사진이 좋았다. 그런데 통독을 끝내고 정독을 시작하자 생각 외로 글이 담담했고 심지어 서글프기까지 했다. 가난한 사진작가가 제주로 흘러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명성만큼 화려하지 않았고 사진만큼 아름답지도 못했다. 가난과 고민의 흔적이 책의 곳곳에 있었다. 단감인 줄 알고 먹었는데 떫은맛이 입안에 퍼진 듯 잠시 동안 쌉싸름한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김영갑의 삶에서 제주는 절대적 대상이자 상대적 자아이기도 한 것으로 읽혔다. 앉은자리에서 책을 내리읽는다 한들 단번에 작가의 세계를 이해할 리 없었다. 적당히 멈춘 페이지에 책의 가름끈을 끼워 넣고 카페를 나섰다. 식사도 잊은 채 다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으로 향했다.
두모악 갤러리는 한적한 내륙 길목의 안쪽에 위치해 있어 10여 년 전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길을 찾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내비게이션이 상용화되기 전에는 지도와 표지판에 의지해 길을 찾아야 했을 테고, 산간 도로의 수많은 갈래길 중 작은 갤러리로 들어가는 입구쯤은 놓치기 쉬웠을 것이다. 그로부터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았건만 나는 T맵 안내를 받아 도착 예정 시각까지 확인하며 아주 쉽게 갤러리에 다다랐다. 막상 도착해 보니 갤러리는 예상보다 고즈넉한 모습이라 마치 과거로 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듯 기술의 진보는 길 찾기에 있어서도 10분 늦냐 먼저냐 하는 편의의 실감뿐만 아니라 시간 감각의 오묘한 뒤틀림까지 낳은 게 사실이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드디어 갤러리로 들어섰다. 초입부터 운치가 있었다. 폐교였던 곳을 2년여 개인 작업을 통해 아트 갤러리로 꾸몄다는 공간답게 잘 정돈된 소박한 분위기였다.
매표가 따로 없는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정원을 거닐 수 있어서 좋았다. 갤러리 전시는 유료일지언정 그 앞에 김영갑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꾸며놓은 공간만큼은 마음껏 드나들 수 있다는 건 그의 의지가 아닐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잘은 모르겠다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별도의 매표소에서 유료 입장부터 확인하고 들어서던 수많은 공간들은 얼마나 팍팍한 당연함으로 자리 잡아 있던가.
그리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정원을 가로지르자 금방 갤러리 입구가 나타났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김영갑 갤러리'라고만 부르기에는 허전했을 공백을 단 세 글자로 잘 채워준 이름이라 생각하며 뒤를 돌아 다시 정원에 들어섰다. 바로 입장해서 전시를 보기보다는 우선 야외를 한 바퀴 둘러보고 싶었다.
때마침 비구니 스님 몇 분이서 갤러리 관람을 마치고 나와 정원을 둘러보고 계셨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더욱 그러하게 만들어 주는 풍경이었다. 자박자박 흙길을 걷다 보니 나무 위에서 동박새들 지저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어떤 수목원에서보다 생생히 들려오는 새소리가 무척 좋았다. 벌써 일주일이 된 여행 첫날의 동백동산이 떠올랐다. 비 오던 그날과는 또 다른 밝은 햇살 아래에서의 지저귐에 한동안 귀 기울이며 행복했다.
이후에 <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마저 읽다가 '동백꽃은 동박새를 유혹하지 않는다'는 소제목 안의 내용이 더욱 눈에 띄었다. 동백꽃을 찾아 모여드는 동박새의 모습을 보며 김영갑은 거듭 밝혔다. 저 동백꽃처럼, 요란스레 떠벌리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진을 남기고 싶다고. 그러면서 더욱 철저한 고독의 세계로 자신을 몰아갔고, 그럴수록 그의 곁에 남는 건 사진과 자연뿐이었다. 김영갑은 외로웠다.
책의 그 부분을 읽기 전 산책이었음에도 동박새가 김영갑 갤러리와 묘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순수한 정신이 깃든 정원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에도 불구하고 많은 새들이 거리낌 없이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동영상 촬영으로 그때의 소리를 담아와서 가끔 듣곤 한다. 당시의 나는 결코 외롭지 않았으나 지금은 오히려 때때로 쓸쓸하다. 외롭다는 건 혼자냐 그렇지 않냐만으로 갈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닌 게 분명하다. 내가 지금 무얼 하는지, 얼마나 만족하는지에 따라 외로움은 찾아오기도 하고 또 극복되기도 한다. 여행이 주는 충만감으로 일상에서 겪는 외로움과 상실의 기분을 달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역시나 중요한 건 순간의 망각이 아닌 오래 남을 기억과 다짐이 아닐는지. 동박새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함께 재생되는 김영갑 갤러리 앞에서의 평화가 더없이 소중한 이유다.
갤러리 내부는 촬영 금지이기 때문에 잠시 휴대폰을 잊고 관람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김영갑의 사진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그의 생애를 다룬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 한 편을 감상했다. 생전에 미디어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그가 유일하게 촬영과 동행을 허락한 다큐였던 만큼 소중한 기록물이었다.
안에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라고는 갤러리 밖에서 들어온 빛이 나무 그림자를 가지고 들어온 모습뿐이다. 워낙에 차분한 분위기에서 사진들을 구경하던 중이다 보니 그마저도 한 폭의 작품처럼 느껴지던 공간이었다.
갤러리 구경을 마치고 다시 정원으로 나오니 해가 높이 걸려 있었다. 더욱 꼿꼿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야생화들이 반짝였다. 미처 보지 못했던 꽃들의 모습에 아까와는 또 다른 기분으로 두 번째 산책을 했다. 여전히 동박새가 지저귀는 가운데 제주 바람 특유의 풀잎을 가르는 소리가 잔잔했다.
정원의 구석구석에서 김영갑 선생의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다. 작은 석상들에서부터 돌담에 이르기까지 김영갑 갤러리는 정원까지를 포함한 모든 공간이 커다란 전시장인 셈이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시'란 서울 코엑스에서 수시로 바뀌어 열리는 '전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상업성 여부에 달린 게 아니라 전시자가 지닌 애정의 정도에 따른 차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상인이라 해도 꽃과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레저용품이라든지 전자제품을 아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책을 읽기에 적당한 그늘 아래 가로로 긴 벤치가 있었다. 봄의 낙엽이 가을의 그것 못지않게 운치 있게 깔려 있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 섬에 내가 있었네> 를 오래도록 읽었다. 오전과는 달리 김영갑 선생의 글이 낯설지 않았다. 책의 내용 또한 그가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작품에 몰입하면서부터는 고민이나 망설임보다는 몰입과 치열함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굳은 의지로 외길을 추구한 저자의 모습이 더욱 특별하고 존경스럽게 여겨졌다.
내 보잘것없는 사진 실력이나마 사진작가 김영갑에게 견주어 보았을 때의 현격한 차이만큼 그의 제주에 대한 애정은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크기였다. 곤궁한 형편에도 그나마 벌어들인 돈은 필름을 사는데 다 써버리며 철저하게 작품에만 몰두했던 김영갑. 그의 이러한 작품혼은 신실한 청교도인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절대적이고 신앙적인 수준이었다. 또한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던가. 난치병에 걸려 몸이 점점 굳어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주에서의 작업에 몰두한 그였다. 그리고 이는 어떤 소문이나 주장에 의한 증명이 아닌, 작품들과 생애 전체가 드러내는 바이기에 그는 예술가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
얼마나 그곳에 앉아 있었을까, 한 직원 분이 다가와 갤러리가 문을 닫을 시간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러고 보니 새들도 어느새 떠난 정원은 조용했고 비스듬히 내려앉은 해가 비추는 그림자들이 옆으로 길쭉하게 늘어져 있었다. 김영갑의 공간에서 본 김영갑의 책과 사진이라서 더 특별하고 깊은 여운이 있던 시간이었다.
차를 타고 나오다가 잠시 한적한 골목에서 식당을 검색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세 덩이가 통통통 가까워지는 거였다. 성견 두 마리와 새끼 강아지 한 마리였다. 별다른 경계심 없이 내게 와서는 꼬리를 흔드는 모습에 잠시 배고픔도 잊은 채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한참 내 주위를 맴돌다 멀어진 세 마리가 혹시나 길을 잃은 게 아닐까 싶어 차로 따라가 봤는데, 골목 안쪽으로 평화로이 들어가길래 주인집이 거긴가보다 하고 안심했던 기억이다.
최근에 효리네 민박을 보니 길가에서 강아지를 만나 주인을 찾아주는 에피소드가 나오던데, 나 역시 제주에서 심심치 않게 개들을 봤다. 대부분 털이 깨끗하여 자유롭게 풀어놓은 애완견처럼 보였는데 간혹 가다가는 누런 개가 멀리 달아나 유기견인가 싶기도 했다. 물론 나는 제주도민인 이효리처럼 개를 데려다가 어떻게 할 생각은 가질 수 없었고 그저 '제주에는 개가 참 많구나' 감탄하는 정도였다. 옆에 아이유는커녕 아무도 없었므로 혼자만 귀여워하는데 만족했음은 물론이다.
돌이켜 보니 내가 제주에 있을 당시는 막 효리네 민박을 촬영한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오르내리던 시기였다. 인기몰이를 하고 엊그제 종영한 그 방송을 가끔 볼 때마다 나의 여행을 함께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더는 지체할 수 없을 정도의 허기가 밀려왔다. 마침 인근에 또 괜찮은 맛집이 있었다. '가시 식당'. 표선면에 있는 가시리의 지명을 딴 평범한 식당이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도 소문난 곳이라는 정보였다.
정말 내가 먹어본 최고의 두루치기였다. 특별히 '제주' 두루치기라고 홍보를 하지도 않고, 작은 식당 안에서 사장님이 직접 고기를 썰어서 주시는 정육 식당이었는데 그 맛은 매우 특별했다. 별도의 메뉴임에도 밥과 함께 나와서 맛볼 수 있던 몸국 역시 진하게 우려낸 깊은 맛이었다. 두루치기 1인분만 주문할 수는 없어서 2인분을 혼자서 다 먹었다. 만약 1인분 주문이 됐다고 해도 추가 1인분을 더 시켜서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꽤나 긴 하루였다. 자연 속 갤러리에서 한 예술가의 삶을 그려보며 느꼈던 여운에 비한다면 짧았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스름 저녁 무렵 숙소로 돌아가던 길, 그날따라 해 저무는 제주 하늘의 빛깔이 더 아름다워 보여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이리저리 스냅샷을 찍고 보니 구도야 그렇다 쳐도 사진마다 하늘색이 참 예뻤다.
김영갑이 특히 사랑했던 제주의 오름에는 아직 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그곳에 가서도 간단하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댈 생각을 하니 왠지 선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였다. 방금도 너무 쉽게 찰칵찰칵 거리고는 제 사진에 취해 만족한 나였다. 무거운 카메라들을 들고 산과 들을 다니며 찍은 수고로운 필름 사진에도 쉽게 만족하지 않은 채, 제주의 순간순간을 끊임없이 기록한 작가의 노력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즐겨 나가되 결코 제주의 풍경을 당연히 여기지 않을 것을 마음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