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21코스 첫 번째 이야기, 하도 해변에서 홀로 헤엄치다.
# 제주 올레길 21코스, 해녀박물관~종달바당
# 11.3Km, 7시간 2만 6천 걸음
# 제주 동부의 고른 체험, 마을길 1/3, 바닷길 1/3, 오름길 1/3
# 홀로 차지해 헤엄쳤던 바다, 하도 해변
# 짧고 가파른 등산 후의 환상적인 풍경, 지미봉
짧은 시간에 많은 명소들을 둘러보려면 렌터카만한 이동 수단도 없다. 3~4박 여행이 주를 이루는 제주도에서 그 어떤 곳보다도 '하, 허, 호' 차량 번호판을 많이 볼 수 있는 이유다. 자동차로 여러 군데를 신속하게 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게 된다. 이 같은 스팟성 여행에서는 다양한 경험이 가능한 반면 풍부한 감상이나 여유로운 사색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에 쫓기는 게 사실이다.
나의 지난 일주일은 비록 렌터카를 이용했을지언정 충분히 느렸다고 생각했다.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할 때조차 수시로 멈춰 서서 풍경을 바라봤고, '한 군데 더'를 위해 이동하기보다는 '조금 더 있자' 주의로 마음에 든 장소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동안 다녔던 곳들을 목록화 해 보니 기간에 비해 많이 다녔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루에 꼭 카페에서 한 시간 이상씩 머무는 여행 방식을 두고 적어도 가이드북에서 말하는 '알짜코스' 같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충분히 누리고 있는가? 느린 여행이 곧 천천히 만끽하는 여행을 뜻하는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한 달 30일 여행이 3박씩 열 번 하는 여행과 다를 게 무엇인가? 1년에 한 번씩 제주를 찾는다고 가정했을 때 10년이면 30일은 될 텐데, 나는 그저 시간을 앞당겨 모아서 여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결코 모자라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넘처서였다. 제주여행의 만족감 말이다. 기대한 이상으로 잘 먹고 잘 다니며, 다양한 감상과 체험을 기록하고 있는 나였다. 언젠가는 이 만족감이 줄어들까 봐 오히려 불안했나 보다. 가보려 했던 곳들을 하나 둘 지워가고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욕심도 있던 것 같다. 특별히 오랜 기간을 계획하고 왔기에 가능한, 제주에서의 남다른 경험이라고 내세울 만한 걸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올레길을 걸어야 했다. 스쿠터도, 자전거도 아니었다. 오로지 두 다리로 제주의 곳곳을 다녀보고 싶었다. 진짜 느리게 하는 여행이 어떠한지, 최소한 하루는 꼬박 걸으며 느껴봐야만 알 것 같았다. 안 가봤던 지역, 적당한 길이와 난이도 등을 고려해 코스를 골랐다. 제주 동부의 다채로운 자연을 겪을 수 있다는 21코스가 제격이었다.
21코스는 지금까지 조성된 올레길 중에서 가장 최근에 완성된 코스라고 한다. 지도를 보니 이로써 비로소 제주도 주변을 한 바퀴 다 아우르는 길이 완성된 것 같았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찾아보니 참으로 다양한 올레길 코스가 있어서 그만큼 제주의 자연환경이 다채롭다고 여겨졌다.
출발 지점은 세화리의 해녀박물관이었다. 어렵지 않게 큰 건물을 찾을 수 있었고, 널찍한 주차 공간에 별도의 체크 없이 차를 대 놓을 수 있었다. 차에 있던 물품들 중 일부를 미리 준비해 온 가벼운 가방에 옮겨 담았다. 물과 수건, 바람막이, 선크림, 셀카봉, 미니 삼각대, 초코바 등이었다.
박물관 앞의 잔디밭에서 올레길 표지석을 찾았다. 화살표가 올레길에 접어드는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올레길의 표식인 리본을 잘 따라가라는 안내문도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사실 헤맸다. 박물관 뒷길의 작은 언덕을 지나는데 좌우 모두가 올레길이라서 헷갈렸다. 그곳은 21코스의 시작임과 동시에 20코스의 끝이기도 했기에 방향을 잘 잡아야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숲 속에서 백구 한 마리가 눈에 띄어 따라가 봤다. '가만, 무슨 영화처럼 이 개가 나를 인도해 주려나'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 멀리에 주인이 있는지 나를 쓱 쳐다보더니 왔던 곳으로 다시 멀어졌다. 결국 이전에 본 리본이 있던 지점으로 돌아가서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어리버리하다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원래 길눈이 밝은 편은 아닌지만 일상에서 불편을 느낄 수준은 아닌데, 여행에서는 아무래도 아쉬울 때가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왠지 나 자신이 참으로 일관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재미있었다.
지도로 방향을 찾아 금세 올바른 코스에 접어들 수 있었다. 작은 학교 운동장을 지나 마을 쪽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동쪽 해안길을 향해 가면서 얼마간 내륙을 가로질러야 했다.
그렇게 올레길에 접어든 지 10여 분이 지나자 눈 앞에는 넓은 밭길이 펼쳐졌다. 제주도 특유의 돌담을 경계로 쨍한 갈색의 흙이 가득했다. 경작지라서 그런지 흙은 매우 고르게 펴져 있었고 곳곳에 녹색 작물들이 건강해 보였다. 이게 바로 제주의 땅이구나 싶었다. 알려진 관광지들을 다닐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제주를 제대로 알려면 올레길을 걸으라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벌써 들었다.
기대한대로 차를 타고 지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봤을지도 모르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모습들도 두 발로 걸으며 천천히 바라보니 그제야 소중하게 보였다. 때로는 잘 닦여진 길을 걸으며, 또 때로는 거칠고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며 올레길의 빨강 파랑 리본이 계속 반가웠다. 오래 걸어야 하므로 초반에 흥분해서 지치지 않도록 물을 충분히 마셨다. 햇살이 강한 날이라 밀짚 모자로 얼굴도 잘 보호했다. 자주 입어서 잘 길들여진 기능성 의류 상하의가 통풍이 잘 되어 걷기에 편했다.
올레길 표시는 마을 담벼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자가 작은 골목에서 행여 길을 헤매지 않도록 안내해 주는 화살표가 슬레이트 지붕의 파란색과 잘 어울렸다. 바람에 너부끼던 올레길 리본과, 분기점에 간혹 붙어있던 화살표들은 직접 올레길을 걷지 않는 이상 여간해서는 눈여겨보지 않았을 표식이었다. 속도의 문제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른 발견의 차이라고는 생각하나, 어쨌든 여행의 디테일을 챙기는 데 걷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는 건 분명하다.
해안길에 접어들자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줬다. 바다를 바라보며 멈추지 않고 꽤 걸었다. 옆으로는 차들이 불규칙하게 지나다녔다. 시속 몇 킬로미터인지 짐작이 가지는 않았지만 걷는 속도에 비한다면야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였다. 빠를 때 느린 것을 보던 때와 비교해 느릴 때 빠른 것을 보자니 어떤 불안감 같은 게 일었다. 원래 그렇다. 운전자도 자리를 바꿔 조수석에 앉으면 자신이 운전할 때와는 달리 속도가 더 빨라 보이고 위태로운 법인데, 보행자가 바라보는 자동차란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여러모로 조금 느린 편이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생각이 많기 때문에 이를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시간이 다소 걸리며, 행하면서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을 기울이곤 한다. 매사가 그렇지는 않으나 대개 그렇다는 말이다. 어릴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게 성인이 되어 특히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좀처럼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성향 같아 일부러 빠른 척을 했던 기억이 많다. 누군가 조수석에 앉아 잔소리를 할 기미라도 보이면 더 그러했다.
요컨대 '나는 느리지 않다'를 입증하기 위해 내가 보기에는 위태로워 보이는 차에 올라타 급하게 운전했던 것이다. 내려서 걸어보니 이토록 좋은데, 그때는 어떻게든 차를 타고 달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목적이 생겨서든, 생계를 위해서든 언젠가는 다른 차에 올라타고 속도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의 이 안정감에 충분히 감사하기로 했다. 차에서 내릴 자유가 있었듯, 다시 올라탈 자유도 내게는 주어졌으므로.
걸은 지 두어 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백사장을 지나는 길로 코스가 이어져 있었다. 지도를 보니 하도 해변이었다. 여름이 오기 전이었는데도 그날따라 날이 따뜻했고 계속 해를 쬐며 걸었더니 무척 더운 편이었다. 제주도 특유의 투명하고 푸른 바다를 따라 걸으니 풍덩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백사장은 주위와 적당히 분리되어 해수욕을 즐기기에 딱 알맞은 지형이었다. 마침 주위에는 다른 사람도 없었다.
어? 진짜 바다에 들어가도 되겠는데?
올해 들어 첫 해수욕을 나는 그렇게 아무도 없는 하도 해변에서 혼자 즐겼다. 너무 행복하고 시원했던 수영이었다. 올레길을 걷다가 바닷가에서 헤엄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경험이었다. 인생 최고의 바다 수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분이 좋았다. 미니 삼각대를 가지고 있던 덕분에 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볼 수도 있었다. 도중에 저 멀리서 웨딩 사진을 찍는듯한 일행이 왔으나 그들이 보든말든 나의 혼자 놀기는 계속됐다. 일부러 하라고 해도 이런저런 조건을 다 갖추기는 힘들었을 완벽한 하도 해수욕이었다.
스포츠웨어를 입은 덕분에 바다에서 나와 햇볕을 쬐니 물기는 금방 없어졌다. 타월로 한 번 더 몸을 닦아내고 짐을 챙겨서 다시 길을 나섰다. 올레길 리본이 펄럭이는 하도 해수욕장을 돌아보니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만한 풍경과 감상이었다. 이에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올레길 21코스를 자신있게 추천한다. 나머지 스무 코스들과 비교해 보고 나은 점을 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살다보면 더 나은 것들을 예상할 수 있음에도 이미 내가 겪은 바를 최상으로 여길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