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21코스 두 번째 이야기, 지미봉에서 낮잠 자고 경치에 감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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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해변에서의 수영을 끝내고 다시 접어든 올레길 21코스. 젖었던 몸은 금세 말랐지만 트래킹화가 물기를 머금고 있어 발이 약간 불편했다. 해안 방풍림을 따라 길이 쭉 나 있길래 앉아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쉬었다. 여전한 바다 풍경에 눈은 계속 시원했고 따스한 햇살 아래 온몸이 점차 보송해져 갔다. 많이 걷다가 쉬려니까 오랜만에 깨어났던 근육들이 숨을 고르는 게 느껴졌다. 수시로 물을 마시며 걸어온 터라 목은 마르지 않았지만 수분을 충분히 섭취해서 나쁠 건 없었다. 작은 페트병에 남아있던 생수를 모두 마셨다. 초코바도 하나 꺼내어 먹었다.
하도 해수욕장과 철새도래지를 사이에 두고 길게 나 있는 다리를 건넜다. 시야가 트여 있어서 그런지 지나온 길을 돌아보자 조금 전까지 있던 곳도 꽤 멀게 느껴졌다.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땀을 닦으려고 보니 가방 줄에 둘러놨던 스포츠 타월이 사라져 있었다. 걷다가 흘린 듯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길을 되돌아 가며 파란 타월을 찾았다. 올레길에 뭔가를 흘리고 가기가 싫었다. 꽤 한참을 거슬러 가다 보니 바닷가 부근의 돌바닥에 타월이 멈추어 있었다. 현무암 표면이 꺼끌꺼끌한 덕분에 멀리 날아가지 않고 붙어있는 듯했다. 대단한 걸 찾은 건 아니지만 왠지 기뻤다. 사소한 내 것이나마 잃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좋았나 보다.
다시 내륙 쪽으로 접어들자 지미봉(오름)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이제 코스의 2/3 무렵을 지난 셈이었다. 오르지 않고 돌아가는 길도 있었으나 이왕이면 정상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가파르지만 길지 않아 20여 분이면 도착'이라는 안내문의 내용이 살짝 마음에 걸렸으나 얼마나 높으랴 싶어서 단숨에 올라갈 생각이었다.
웬걸, 정상까지는 예상보다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200미터가 채 안 되는 고도의 오름이지만 이를 20분 내에 오르도록 조성한 경사로는 일반적인 수준 이상이었다. 중간에 멈추기도 애매해서 숨을 헉헉대며 쉬지 않고 올라갔다. 벤치 하나가 드디어 보이길래 드러누웠다.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고 와서인지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다행히 나무 그늘이 있어 밀짚모자로 얼굴만 덮어쓰고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나른한 잠에 빠졌다.
볕이 뜨거워서 오래지 않아 잠에서 깼다. 모자를 치우고 올려다보니 마침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한 가닥 흰 띠가 생겨나는 모양이 청명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했다. 잠깐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굉장히 개운했다. 새 페트병을 따서 물을 마셨다. 오전에 편의점 냉장고에서 꺼냈을 때는 시원하던 생수가 이미 미지근했다. 몇 모금을 입 안에 머금었다가 헹궈냈다. 남은 물을 한 손에 따라내어 세수도 했다. 올라온 시간을 보니 정상에는 거의 도착한 것 같았다. 짐을 챙겨서 다시 오르막을 올랐더니 역시나 금방이었다.
말 그대로 사방이 탁 트인 지미봉 정상이었다.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였는데, 거기서 바라봤던 풍경에 못지않게 광활하고 멋진 현재의 전망이었다. 360도 뷰라고 할 만한 사방팔방의 경치가 탁월했다. 불어오는 바람도 몹시 시원했다. 21코스에서 감동을 계속 갱신해 오니 무뎌질 법도 했건만, 지미봉 꼭대기에서는 도저히 담담할 수 없었다. 셀카봉으로 동영상 촬영도 하고, 영상통화로 여자 친구에게 주위를 보여주기도 하며 또다시 혼자놀기를 마음껏 즐겼다. 소리도 몇 번 질러봤다. 들려오는 메아리는 없었으나 내 안의 울림통은 실컷 울려 퍼졌다.
봉우리에서 내려오니 몹시 배가 고팠다. 종달리 해안을 따라 식당을 찾아봤다. 코스를 약간 벗어난 곳에 맛집 하나가 있었다. '어멍이 해녀' 식당이었다. 더운 날씨를 오래 견딘 만큼 시원한 물회가 딱이었다. 전복물회는 며칠 전에 먹었으니 이번에는 한치물회를 주문했는데, 사장님이 재료가 떨어졌다고 했다. 대신에 광어로 물회를 만들어 주실 수 있다길래 그리 해달라고 했다. 원래 메뉴보다 푸짐하게 내어주신 듯했다. 유리 너머가 잘 보이는 자리라서 이따금씩 고개를 들고 먼 바다를 바라보며 두툼한 회를 우물거렸다. 정말 맛있게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6시간도 넘어 있었다. 21코스 예상 소요시간이었던 4~5시간을 훌쩍 넘긴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되도록 천천히 걸었던 데다 중간에 수영도 하고 몸도 말리고 지미봉에서는 낮잠까지 잤으니 평균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속도였던 거다.
이제 남은 구간은 비교적 단조로운 해안길이었다. 물회에 밥 한 그릇까지 가득 채운 몸을 이끌고 이제는 코스 완주를 향해서만 발걸음을 옮겼다. 달달한 망고 주스 한 잔이 생각났지만 상점이 거의 없는 한적한 길가라서 후식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종달 바당에 이르러 드디어 올레길 21코스는 끝났다. 1코스와 맞닿은 지점임을 지도로 확인하고 비로소 완주를 실감했다. 약 7시간을 소요했고 2만 6천 걸음을 걸었다는 웨어러블 기기의 정보도 확인했다. 역시 풍부한 감상에 비해 숫자에 의한 기록은 너무나도 건조하고 단순해 보였다. 차를 세워둔 출발지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휴대폰을 검색해본 후 전자기기들은 모두 가방에 넣었다. 종달바당 부근을 둘러봤다. 근처에 철새들이 많이 있는 곳에 멈추어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바닷가에 줄지어 있는 색색깔의 바람개비 도는 모습도 한동안 지켜봤다.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해녀 박물관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면 마을 안쪽으로 약 15분을 더 들어가야 했다. 목적지가 분명한 단기간의 걸음이란 올레길을 걸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이미 21코스를 모두 걸어서 올레길은 '끝났다'는 인식이었고, 이에 얼른 돌아가서 휴식하고 오늘의 소회를 남겨 놓아야겠다는 마음만 강했던 것이다.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이용하는 대중교통이었지만 스마트폰 덕분에 정보를 알아내기는 무척 쉬웠다. 제주가 아무리 특별하고 이국적이라 해도 국내여행이 분명하다는 확인을 한 순간은 이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있다. 올리브영이나 편의점에 들어가서 필요한 물건을 손쉽게 살 때가 특히 그랬고, 사람들과 말을 편히 섞을 때도 당연히 그러했다.
701번 버스를 타고 해녀박물관이 있는 세화리 방면으로 돌아갔다. 창 밖을 구경하며 혹시나 걸어온 길을 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버스 노선은 내륙 안쪽의 직선 도로를 따르는 빠른 길이었다. 해안을 도는 외곽 길에 비해 참으로 빠르고 간결한 경로였다.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해녀박물관 입구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토록 쉽게 7시간 전의 장소로 돌아오다니, 대중교통으로 얻는 편의가 새삼 놀라우면서도 어쩐지 헛헛한 기분이었다. 지나다니는 차들을 바라보며 오전에 떠올렸던 '느림의 단상'을 다시 생각했다. 앞으로 되도록 많이 걸어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또 한 번 했다.
느리게 걸으며 많은 것을 느꼈던 올레길 21코스였다. 지나온 길보다는 순간순간 새로 맞는 길에 감탄하고 집중했던 순간들이었다. 특히나 하도 해변에서 홀로 수영했던 시간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지미봉에서 바라본 풍경도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루의 순례는 짧으면 짧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날보다 진한 여행의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날 밤에는 참으로 맛있게 잠들었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