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직도 그림이 부러울까

by 차돌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부럽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


일러스트와 에세이가 함께 실린 책을 읽다 보면 꼭 그런 생각이 든다. '와... 나한텐 왜 이런 재능이 없을까?' 그림도 훌륭한데 문장까지 좋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책을 덮고 나면 한동안 내 글은 밍밍해 보인다. 그림 하나 없이 텍스트로만 표현하는 내가 조금은 초라해진다.


어릴 때 내게 미술이란 그저 교과목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보고 따라 그리는 데생은 그럭저럭 흉내 냈지만, 수채화로 넘어가면 상황은 참담했다. 물은 늘 과했고, 색은 번졌고, 나는 그 위에 덧칠을 반복하다 종이를 울고 벗겨지게 만들곤 했다. 그쯤 되면 그림이라기보다 거의 물감 장난에 가까웠다.


'미술'하면 아직도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이 하나 있다. 열두 살 무렵, 잠시 다니던 미술 학원에서의 일이다. 아마 다닌 지 며칠 안 되었거나, 첫날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테이블 위에 찻잔 하나를 올려두고 우리에게 그걸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연필을 꼭 쥐고 컵받침과 찻잔을 열심히 옮겨 그렸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그리나 돌아볼 겨를도 없이 몰입했고, 완성되어 가는 그림은 내가 보기에 제법 그럴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생님이 '이제 그만' 하며 아이들의 스케치북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이들도 고개를 들어 서로의 그림을 힐끗거렸다.


그때였다.

"아하하하, 오빠 이게 뭐야?"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두 살 아래 여자아이가 내 그림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무엇을 잘못 그렸는지 몰라 내 그림과 그 애의 그림을 번갈아 비교했다.


그림 실력은 사실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그림 속 찻잔은 손바닥만 했고, 내 그림 속 찻잔은 스케치북을 거의 가득 채울 정도로 컸다. 여백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정물의 비율은 무시한 채, 확대된 찻잔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 그리면 되지."

내 자리의 작은 소란을 보고 다가온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 얼굴은 이미 화끈거렸고, 학원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시 그리라'는 말은 내가 분명히 잘못 그렸다는 판정처럼 들렸다. 찻잔 따위를 왜 그렇게 크게 그렸는지, 스스로가 한없이 바보 같고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때 기가 죽어서였을까. 실은 피카소나 샤갈이 될지도 몰랐던 나의 미술 재능은 그날 이후 서서히 사라져 갔다.


물론 투정에 불과하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라도 내 부족한 그림 실력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시절 이후로 미술과는 점점 멀어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깨달았다. 내가 싫어했던 건 미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림을 잘 못 그리는 나였다는 것을. 나이를 먹을수록 유명 화가의 전시를 보는 일이 좋았고, SNS에서 만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키치한 그림에 수없이 감탄했다.


그러던 내가 그림을 직접 그리고 싶다는 마음까지 갖게 된 건 아마 7~8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매일의 여행 감상을 에세이로 기록하는 일이 무척 즐거웠다. 사진과 글만으로도 충분히 풍성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한 가지가 아쉬웠다. 제주의 소품 가게에서 보던 예쁜 일러스트처럼, 내 글 사이사이에도 그림을 채워 넣고 싶었다. 사진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감성,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건 그림 같아 보였다.


실은 이 글을 끄적이게 된 계기도 우연히 선물 받은 한 권의 그림 에세이집 덕분이다. 연남동 일대를 그린 소소한 단상이 담긴 책이었다. 나 역시 그 동네에서 4년을 살았기에 더 눈길이 갔다. 내게는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풍경이, 그림을 잘 그리는 이에게는 알록달록 특별한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에 또 한 번 감탄했고, 부러워했다.


AI가 무엇이든 척척 그려내는 시대라지만, 프롬프트와 결과물이 손으로 직접 그려내는 성취감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완벽한 그림 같은 게 아니다. 인상적인 풍경을 천천히 따라 그리는 시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나만의 시선이 담긴 작은 삽화 하나.


이제는 제법 어른이 되었으니, 좁쌀만 한 걸 호박만 하게 그린다 하더라도 누가 대놓고 비웃지는 않겠지. 늦지 않았다. 언젠가는, 취미로라도 색연필화를 시작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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