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하루, 전국에서 제주도의 미세먼지 수치가 가장 높았다.
# 알작지(몽돌) 해변 - 순옥이네 명가 - 고망딱새 - 제주 도립미술관
미세먼지 덕분에 하루를 더 차분하게 보내고 나니 보이는 게 많았다. 한 줄기 햇살에 가득한 먼지들처럼, 없다 생긴 게 아니라 원래 내 머릿속을 어수선하게 부유하던 생각들일 것이었다.
푹 잔 덕분에 한결 가볍게 눈을 떴다. 방 안이 살짝 어두웠다. 아직 새벽인가 싶어 시계를 봤더니 8시는 진작에 넘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 밖을 보니 어제 이상으로 날이 흐렸다. 먹구름이 낀 날씨는 아니고, 그냥 침침-했다. 기대했던 쨍한 햇살이 없어서 그런지 더 어두워 보이는 하늘이었다.
오늘 제주에 미세먼지 심하니까 조심해요~
씻고 나갈 준비를 하던 내게 호스트 아주머님이 말씀하셨다. 미세먼지? 제주도라고 예외는 아니란 말인가. 반신반의하며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이럴 수가, 전국의 미세먼지 농도가 보통 수준인데 반해 제주도만 '나쁨'에 속하는 수치로 나타났다. 기류의 영향이나 자세한 건 모르겠다만 생각지도 못한 날씨임은 분명했다. 그 어느 지역보다 맑고 깨끗할 줄로만 알던 제주도인데.
자전거를 타 보려던 계획을 즉각 변경했다. 세간이 온통 미세먼지의 심각성으로 들끓는데 나 홀로 무신경할 수는 없었다. 미세먼지 주의보가 있던 날 밖을 돌아다니다가 목이 칼칼했던 경험도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실내 전시를 하나 정도 보고, 새로운 카페도 한 군데 더 찾아서 여행기 작업을 마저 하리라 생각했다. 여행 계획이 엄밀하지 않아서 좋은 건 이렇듯 날씨라든지 다른 변수가 생겼을 때 변경이 용이하다는 점이었다.
오후에 들를 도립 미술관의 위치를 확인해 놓았다. 그 전에는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아무리 미세먼지가 심하다고는 해도 오전에는 바람을 쐬고 싶었다. 둥글둥글한 몽돌이 가득한 작은 해안가인 '알작지 해변'으로 갔다.
하늘이 흐리니, 땅을 실컷 구경할 만한 알작지 해변은 나름의 대안이었던 셈이다. 제주에서 유일한 몽돌 해변으로, 과연 가이드북에 안내된 대로 매우 작은 해안가였다. '크게 구경할 거리는 없다'는 평가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난 도착하자마자 그곳이 마음에 쏙 들었다.
찰싹찰싹 얕은 파도가 밀려와 둥근 돌들에 달그락 부딪는 소리가 정겨웠다. 백사장이 눈부신 바닷가나 피서객들로 활기 넘치는 해수욕장들도 멋지지만, 흐린 날 몽돌 해변에서 혼자 느끼는 정취도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모난 부분 하나 없는 매끄러운 몽돌을 보고 있노라니 괜스레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했다. 마침 기념 삼아 제주의 예쁜 돌 몇 개를 가져가고 싶던 터라 해변 바닥을 주의 깊게 살피며 마음에 드는 돌을 골랐다.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들은 물론이고 완벽한 타원형의 분홍빛 돌까지, 색깔도 모양도 저마다 다른 수많은 돌들이 다채로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닥만 쳐다보며 한참 동안 돌을 주워 담았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돌들을 모아서 길가에 나란히 세워봤더니 참 예뻤다. 이따금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과, 해변에 와서 잠시 사진만 찍고 돌아간 두어 무리 여행객들을 제외하고는 알작지 해변에는 오래도록 나 혼자였다.
딱 내 밀짚모자에 들어갈 정도로만 돌을 모았다. 더 고르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지경이었다. 역시 집어 드는 것보다 버리는 일이 더 어려웠다. 큰 돌들은 도저히 챙겨가기에 무리일 것 같아서 내려놓고, 작은 돌들만 가방에 넣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한 시간 반이나 흘러있었다. 내 집중력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 석(石)가 아니랄까 봐 돌들에 한참 취해 있었나 보다.
점심은 물회로 정했다. 워낙 유명한 맛집이라 미리 눈여겨봤던 '순옥이네 명가' 식당이 멀지 않은 도두항 근처에 있었다. 대기 중인 사람들이 많아서 대기표를 받아 기다려야 했다. 웬만하면 안 그러지만, 그곳의 물회는 충분히 기다릴만했다. 전복, 해삼, 소라가 골고루 들어간 물회가 새콤했다. 오도독 오도독 식감이 좋아서 더 열심히 먹었다.
북부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다. 날은 맑아질 기미가 없이 계속 흐렸다. 제주에서 흐린 날씨를 몇 번 겪어보긴 했지만 그날은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던 만큼 거리가 유독 한산하게 느껴졌다. 현지인이든 여행객이든 검색 한 번이면 나처럼 날씨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 여행객이 줄면 줄었지 늘지는 않았을 터였다. 문득 '가이아 이론' 따위가 떠올랐다. 좀 쉬고 싶은 제주도가 사람들을 덜 돌아다니게 하고 싶어서 부러 날을 흐리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자정작용 말이다.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는 제주와, 미세먼지로 희뿌연 제주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봐야 할 것인가. 자연의 입장에서는 괴롭히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해도 미세먼지가 심해지면 딱히 반길 일도 아니리라 싶었다.
미술관에 가기 전에 커피 한 잔을 마시기로 했다. 바닷가를 해안 도로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는 큰 카페를 찾았다. 창이 넓고 간판의 이름이 특이해서 눈에 띄었다. 망설임 없이 차를 멈춰 세우고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고망딱새'는 널찍한 내부 한쪽에서 기념품들도 판매하는 아기자기한 카페였다. 바깥 못지않게 안에도 사람은 별로 없어서 창가의 좋은 테이블에 편히 앉을 수 있었다. 따뜻한 라떼를 마시면서 익숙하게 여행기를 정리했다. 모처럼 노트를 펼쳐 손글씨로 일정도 정리해 봤다. 역시 컴퓨터에 '입력' 하는 일과 다르게 종이에 '쓰는' 기록은 마음에 더 선명했다.
촉감, 질감의 차이뿐만 아니라 '일정하지 않게' 쓰인다는 점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는 종종 두드러진다. 정해진 시각, 짜여진 일정에 의해 얼마만큼의 의무감마저 드는 '관광'이 아니라는 점에서 나의 제주 여행은 확실히 아날로그의 영역에 속했다. 미세먼지 농도야 어떻든지 간에 예정대로 자전거를 탔다면 좀 더 용맹하고 건강한 여행자로 보였을지는 모르겠다만, 즉흥적으로 카페 안에 들어가 글자를 적으며 느꼈던 충만감만큼은 야외활동 못지않았다.
제주 도립미술관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가 다 된 시각이었다. 관람객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산한 미술관 건물이 한층 평화롭고 운치 있게 느껴졌다.
수심이 얕은 인공 연못이 미술관 앞을 채우고 있는 모습이 주변의 자연 풍경과 잘 어우러졌다. 흐린 날이라 오히려 무채색의 미술관 건물이 더 그윽했다.
사전 정보가 너무 없이 갔던 탓에 2층 기획 전시는 준비 기간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1층에서 상설 전시인 장리석 화백의 기념관과 시민 갤러리를 무료로 둘러볼 수 있었다. 실향민이었던 장 화백이 4년 동안 피난생활을 하며 접했던 제주의 풍경이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음을 확인했다. 제주 해녀들의 건강하고 강인한 모습을 담은 그림 몇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볼 수 있는 실내 전시가 더는 없어서 밖으로 나왔을 때는 5시 무렵이었다. 여행 중 가장 애매한 시간이 그때가 아닌가 싶다. 어디 한 군데 더 입장하자면 매표소들이 마감할 무렵이고, 자연경관을 감상하기에는 남은 해가 충분치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동이나 저녁 식사까지 고려하면 시간적인 여유는 더 줄어든다.
미술관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거닐다가 차로 돌아갔다. 기분 탓인지 하얀 자동차 위로 뽀얀 먼지가 쌓인 듯했다. 벌써 스무날 이상을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 차가 지저분해진 게 당연했지만, 미세먼지 꼬리표가 끊임없이 따라붙은 그날이어서 새삼스러웠던 것 같다. 차에 시동을 걸고 괜히 워셔액 분사와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워셔액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깜빡했다. 다음부터 렌터카를 빌릴 때는 워셔액이 나오는지도 미리 확인 해보리라 생각했다. 마른 유리를 쓱싹이는 와이퍼의 소리가 퍽퍽했다.
숙소로 일찍 돌아가서 샤워를 했다. 아무도 없는 3층 집이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 책을 꺼내 읽었다. 간단한 요리라도 만들어 먹을까 해서 부엌으로 가봤더니 설거지 거리가 잔뜩 이었다. 물론 내가 먹은 게 아니라 주인집의 사용 흔적이었다. 내가 그걸 다 정리하고 새로 음식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평소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여자의 부엌은 저마다의 고유하고 예민한 공간이라셨는데, 괜히 그걸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책을 마저 읽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배가 고파서 눈을 떠보니 방이 어둑어둑했다. 갑자기 짜장 볶음밥이 먹고 싶었다. 안 먹은 지 한참 돼서 그런지 생각할수록 몹시 당기는 맛이었다. 퍼뜩 생각나는 중국집이 한 군데 있었다. 함덕 해변에 위치해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음식점이었다.
해변의 중화요리 식당이라고 해서 괜스레 메뉴 이름마다 '해물'을 붙이거나 한 특별한 곳은 아니었다. 딱 일반적인 중국집 그대로였다. 볶음밥을 하나 주문해서 맛있게 먹었다. 은근히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서 약간 신기했다. 나라면 며칠 동안의 여행에서 굳이 중국집에 들를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인근 주민 같지는 않아 보이는 여행객들이 짜장면이며 탕수육을 먹는 모습이 의아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소문난 맛집이었는지, 다들 나처럼 장기 여행 중에 갑자기 중국음식이 먹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배불리 먹고 나와 함덕 해변을 산책했다. 가까운 카페 델문도의 조명과 멀리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만 유난한 칠흑 같은 바다였다. 낮 동안에 왔던 연락을 확인하고 전화 몇 통을 주고받았다. 불현듯, 다들 여전한데 나만 불쑥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각박하게 여겼던 일상이 떠올랐다. 그땐 그렇게 느리게 가더니, 제주에서는 특별한 목적이나 계획 없이도 잘만 흐르는 시간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여유를 붙잡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남은 날 수를 세어봤다.
만약에 내일도 미세먼지 농도가 나쁘다 할지라도 더 이상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일찍부터 탁 트인 곳으로 나가 마음껏 걷고 싶었다. 쉼도 카페도 실내 전시도 좋았지만 슬슬 좀이 쑤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충전이 충분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