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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Nov 15. 2017

제주 한달살기 Day22 : 타인의 눈으로 보는 여행

오름의 여왕 다랑쉬와 해질 무렵의 광치기 해변에서 바라본 그림자

# 여행 : 여행기 = 실체 : 그림자
# 나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
# 다랑쉬 오름 - 형제국수/brother coffee - 광치기 해변





햇살이 좋았던 만큼 유난히 진한 그림자가 따라다닌 날이었다. 오전에 다랑쉬 오름 정상에서의 내 그림자는 짧고 진했다. 늦은 오후의 광치기 해변에서는 어느 때보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백사장을 가로질렀다. 동굴에 비친 그림자를 실체로 여기는 인간의 착각을 일깨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생각났다. 철학적 깊이의 한계로 인해 정확한 비유나 대입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제법 오래도록 내 여행을 그림자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 봤다. 


빛과 그림자, 어떤 일의 명암을 나타낼 때 밝음의 반대 개념으로 흔히 쓰는 메타포로써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굳이 대입하자면 '여행=실체', '여행기=그림자' 인식해 봤다. 제주에서 나는 늘 '여행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이는 내가 더 자유로운 여행을 추구하게 하는 한편 얼마간의 구속감도 느끼게 하는 원인이었다. 멋진 풍경을 눈 앞에 두고 나는 그것을 온전히 누리려고 하는 동시에 글과 사진을 어떻게 정리하면 효과적으로 이 정취를 타인에게 보일 수 있을지 궁리했던 것이다.


맑은 아침의 오름에 올라 탁 트인 전망에 행복해하면서도 그러했고, 해질 무렵 해변에서 기분 좋은 산책을 하면서도 그러했다. 나는 내가 굉장히 자유로운 줄 알았지만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셈이었다. 답답하거나 싫은 구속은 결코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여행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행의 감상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여행기를 쓰는 일은 이를 읽고 공감할 누군가에 앞서 나 자신부터 더욱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실제로 항상 내 글을 모니터링 해주는 지인들의 호응과 격려야말로 여행기 작성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전부터 탁 트인 곳으로 가리라 다짐했던 어제였다. 덕분에 행선지를 간단하게 정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가장 제주다운 자연, 오름이었다. 제주 동부에서 특히 유명해 많은 이들이 찾는 용눈이 오름과 다랑쉬 오름은 표지판이 갈림길을 나타내 줄 정도로 인접해 있었다. 지난번에 올랐던 용눈이 오름의 능선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다랑쉬 오름 방면으로 향했다.



큰길에서 다랑쉬 오름으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접어드니 금세 외떨어진 길이 나타났다. 일방통행임을 일방적으로 알리는 표시 같은 건 없었다. 좁은 길을 마주오는 차가 없길 바라며,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듯 양옆으로 녹음이 짙은 숲길을 따라 들어갔다.



차로 천천히 진입하다 보니 순식간에 시야가 트이며 봉긋한 오름의 모습이 나타났다. 날이 참 맑아서 머리 위에서 커다란 조명을 비춰주는 듯했다. 다랑쉬 오름으로 향하는 길이 유난히 환하고 밝게 빛나 보였다.



이름이 워낙 예쁘고 독특한 다랑쉬 오름이라 안내문을 주의 깊게 읽어봤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랑쉬 오름은 동부지역의 오름들 중 비고(최고/최저 높이의 차)가 가장 높으며, 굼부리는 백록담과 비슷한 모양이다. 분화구가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사람들로부터 다랑쉬라고 불리었다.



다랑쉬가 뜻하는 '달', '달맞이'에 여성적 의미가 담겨서인지 다랑쉬 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과연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과 계단이 있어서 쉽게 정상의 모습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넓은 시야가 확보될 무렵 잠시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봤다. 바로 앞에 야트막한 '아끈다랑쉬오름'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아끈'은 제주 방언으로, '작은'의 의미라고 한다. 다랑쉬 오름 근처에 있는 작은 오름이라서 붙은 이름인 것이다. 뜻을 알고 나니 그 모양이 더욱 귀엽게 느껴지는 동생 같은 오름이었다.



경사가 꽤 있는 길을 계속 오르다 보니 숨이 차올랐다. 두어 번 정도 멈추어 쉬며 물을 충분히 마셨다. 초코바도 하나 꺼내어 먹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풍경을 되도록 빠짐없이 촬영하느라 휴대폰도 연신 꺼내 들었다. 발보다 손이 분주할 지경이었다. 



드디어 깊숙한 분화구(굼부리)가 눈 앞에 나타났다. 안내문에서 본 대로 정말 백록담과 비슷한 정도의 깊이로 보였다. 직접 확인했던 백록담의 풍경을 떠올리며 비교할 수 있어서 새삼 뿌듯한 기분이었다. 분화구 너머로는 독특한 무늬의 오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짙푸른 숲의 모양이 X자로 보이는 '손지오름'이었다. 어떤 표시를 해 놓은 것처럼 선명한 무늬가 신기했다.



정상에서 둘러본 주위의 경치가 역시 시원했다. 동쪽으로는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의 경계가 흐릿하되 분명하게 이어졌고, 서쪽으로는 무수히 솟은 오름들과 이 모두를 아우르는 한라산의 모습이 짙푸르게 펼쳐졌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까지도 그러한 감상을 도왔다.  



이 무렵부터 햇살과 그림자를 보며 내 여행기를 인식했던 기억이다. 어떻게든 멋진 풍경 사진 속에 나도 들어가려고 이리저리 삼각대를 조정하며, SNS가 실체의 일부만 담아내는 흔한 현실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있는 그대로를 담기 위해 주위를 천천히 동영상으로도 찍어봤지만, 솔직히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표현될 다랑쉬 오름의 풍경이 내가 당장 보고 있는 눈 앞의 그것을 얼마만큼 담아낼지 확신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원체 거짓이나 포장에 서툰 성격인지라, 왜곡이나 과장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그림자를 내가 통제할 수 없듯이 보여지는 여행의 모습은 내가 의도한 대로가 아닌 보는 사람의 시선에 달려있을 터였다. 나 역시 나의 기준으로 타인의 여행을 관찰하고, 거기서 원하는 정보와 감상을 취해서 기억해 왔으므로.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의 방향과 길이처럼 나의 여행기도 때와 장소에 따라 충분히 다르게 읽혀질 수 있을 것을 인정하고 나니, 순간순간을 모두 붙잡으려 애쓰는 건 욕심이라 여겨졌다. 결국 나에게 최선의 여행기란 포착하고 기록하는 순간들의 솔직함이었다. '이곳은 어떻다'는 단정적인 평가보다는, 이곳에서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보았고 이러이러한 느낌을 받았다'는 걸 쓰려고 그때그때의 사진과 메모에 충실했다.





오름에서 내려와 보니 땡볕 아래 놓여 있던 차 안이 찜통이었다. 네 문을 모두 활짝 열어놓고 잠시 근처에 걸터앉아 더 쉬었다. 방금 전까지 찍은 사진들을 살펴보며 다랑쉬 오름의 여운을 마저 붙잡아봤다.



몸에 가득한 열기를 식히러 해변 쪽으로 차를 몰아 나갔다. 곧게 뻗은 길 옆으로 식당을 안내하는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맛을 위해 고기국수를 하루 300그릇 한정으로 판매하고 있다는 '형제국수' 라는 집이었다. 2층에는 'brother coffee'라는 카페도 함께 운영 중인 건물은 크고 세련돼 보였다. 비빔국수와 돔베고기를 같이 먹을 수 있는 1인 세트를 주문했더니 메뉴가 금방 나왔다. 다랑쉬에서의 감상이라든지 차분한 생각들은 온데간데없이 허겁지겁 음식을 해치웠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통유리 아래에 메밀밭으로 보이는 하얀 풀들이 일렁이는 모습이 좋았다. 따로 카페를 찾을 거 없이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머물기로 했다. 아래층에서 식사를 한 손님에게는 작은 케이크(미니 브라우니 크기)가 제공되고 음료도 할인받을 수 있었다. 국수 메뉴의 가성비에 느꼈던 아쉬움을 그나마 카페가 어느 정도 상쇄해 줬다. 





카페를 나와 그동안 거의 가지 않았던 제주 동남부 해안을 드라이브했다. 수산물 공장들이 줄지어 있는 온평리 일대의 해안도로는 매우 한적했다. 첨성대 모양의 특이한 건축물이 보여서 가까이 가봤더니 '도대'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옛 등대의 흔적이었다.



성산일출봉이 잘 보이는 곳에 '광치기 해변'이 있었다. 지도에서 봤을 때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으나 별로 들를 일은 없던, 백사장은 좁지만 경치는 광활한 해안가였다. 성산 일출봉으로 향하는 도로에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좋고 일출 명소로도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인 걸 후에 알았다.



승마가 꼭 초원에서만 어울리는 풍경이 아니라는 걸 그곳에서 확인했다. 일렬로 나란히 걸어가는 말들과, 그 위에 올라탄 아이들의 모습이 평화로웠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태양이 마저 쏟아내는 햇살이 어느 때보다 은은하게 느껴졌다.

 




해변 한가운데에 해를 등지고 앉아서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조금 떨어진 옆에는 한 여성분이 나처럼 홀로 앉아 먼 곳을 지긋이 응시하는 모습도 힐끔 보였다. 어떤 사연이 있는 분위기였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문득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떠할지 궁금했다.


백사장 가운데 길쭉한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운 모습이 재밌었다. 15등신은 족히 돼 보이는 비율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실제를 가늠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저 모습이 곧 나는 아니지만 내가 저 모습을 만든 건 분명했다. 다랑쉬 오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으면서 나의 여행과 여행기 간의 상관관계를 떠올렸다. 어느덧 스물두째날도 저물어 가는 한 달 여행의 후반부였다. 남은 날들은 타인의 시선을 걷어냈을 때 남아있을 '오직 나만의 시선'도 잘 살펴보리라 생각했다. 두 시선의 균형이야말로 여행을 하는 일여행기를 쓰는 일을 더 조화롭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숙소로 일찍 돌아가 열아흐레 날 무렵까지의 일정이며 사진들을 마저 정리했다. 그새 또 카페며 박물관, 오름 등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과 메모가 더해져 여행의 그림자가 계속 늘어지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은 그저 오늘의 다랑쉬와 광치기로 마무리하려고 같은 곳을 여행한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스마트폰으로 찾아봤다. '참 많기도 하다...' 스크롤을 좇는 눈이 어지러워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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