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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Nov 17. 2017

제주 한달살기 Day23 : 호텔 수영장과 고기국수

하루 종일 제주 호텔의 수영장에서 놀 줄이야.

# 메종글래드 제주 호텔 - 장수물 식당 고기국수 - 고망딱새





호텔 수영장에서 종일 놀며 쉬며 하루를 보냈다. 생각지도 않던 일정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예상한 하루를 보냈던 날은 거의 없지만 그중에서도 더욱 뜻밖의 휴일이었다. 

 




주말이었다. 모처럼 호스트 식구들과 아침상을 함께 했다. 직장이 서울인 집주인 아저씨까지 오랜만에 와 계셨다. 아주머님이 생미역으로 끓인 보말 미역국을 주셨다. 진한 국물이 입맛에 맞았다.


오늘은 승마 강습을 받아볼까 한다는 나의 계획을 들으시더니 두 분은 당일에 바로 타는 건 아마 힘들 거라 하셨다. 승마장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주말에는 예약을 먼저 해 놓는 게 보통이라는 거였다. 행여 오늘 강습을 못 받으면 가격이나 시간을 알아보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오니 아이들이 식물을 보며 조잘조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기들이 심었던 모양이었다. 주인집 딸아이와 옆집 아이였다. 나를 보더니 부모님과 수영장에 간다고 신나 했다. 오랜만에 그 모습이 귀여웠다. 여행 초반에는 아이가 내 방을 자주 들락날락하며 저녁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요새는 내가 늦게 돌아다니고 때로는 다른 숙소에서 지내기도 하다 보니 얼굴 보는 일이 뜸해진 중이었다.


위층 창문이 빼꼼 열리더니 아주머니가 승마는 다음에 하고 오늘 호텔 수영장에 같이 놀러 가지 않겠냐고 하셨다. 아이를 데리고 갈 건데, 지인을 통해 할인받은 가격으로 수영장만 이용하실 계획이라면서. 잠시 생각해보니 승마는 전화로 먼저 문의를 하고 다음에 약속된 시간에 가도 되겠다 싶었다. 최근에 수영을 배웠다는 아이의 물놀이 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아질 것 같기도 했다. 방에 다시 올라가서 수영복을 챙겼다.

   




차를 따로 타고 내가 먼저 메종글래드 제주 호텔에 도착했다. 하필 그날 호텔 연회장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 통에 주차장이 붐벼서 근처를 몇 바퀴 돌다가 간신히 차를 댔다. 혹시 수영장에도 사람이 많지 않을까 했으나 다행히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투숙객 중 일부로 보이는 몇 사람만이 일찍부터 나와서 태닝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깨끗한 풀과 자쿠지까지 있는 수영장은 적당한 규모로 깔끔했다.



아래층에는 유아용 풀이 더 큰 크기로 있었다. 호스트 식구들과 옆집 가족들은 그곳에 있는 썬베드에 자리를 잡았다. 잠깐 아래로 가봤더니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놀기에 여념이 없었다. 금방 다시 내 자리로 올라와서 한가함을 만끽했다. 



사람이 적어서 물이 더 깨끗했다. 물안경 없이 수영하며 눈을 꿈뻑여도 따갑지 않았다. 썬글라스를 낀 채로 유유히 물에 떠 있다가 썬베드로 돌아가 쉬기도 하면서 한참을 자유롭게 수영하며 놀았다. 올레길을 하이킹하다가 하도 해변에서 느닷없이 혼자 해수욕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https://brunch.co.kr/@hyuksnote/37)

   


사람이 워낙 없어서 혼자서 마음껏 놀다 보니 셀프 동영상까지 찍었다. 그래도 수영장이므로 조심스럽게 촬영했는데, 어차피 주의할 만한 풍경(?)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소문인데, 내가 갔던 날로부터 1주일쯤 전에 메종글래드 호텔 수영장에 러시아 모델들이 와서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아주머니들의 말로는 비키니 수영복이 손바닥 만했다고 한다. 아... 1주일만 빨리 갔더라면.





한참 혼자 놀다가 다시 아래로 가보니 아이들은 쉬지 않고 물놀이 중이었다. 부모들이 데리고 놀아주지 않아도 저희들끼리 무리지어 뭐가 그리 재밌는지 꺄르륵 웃으면서 연신 첨벙거렸다. 보면 볼수록 기분 좋은 아이들의 모습에 나도 잠깐 놀이에 동참했다. 물속으로 들어가 잠수 상태에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만 나와서 숨쉬고 다시 잠수하는 거였는데, 아이가 무척이나 좋아해서 몇 번이나 하면서 놀았다.


난 어렸을 때 물을 참 무서워했다. 타고난 성향 때문이든 어떠한 이유에서든 다른 친구들에 비해 유난히 심해서,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수영장에라도 놀러 가는 날이면 무조건 물 밖에서 심심하게 구경만 했던 기억이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위해 초등학생 때 수영강습을 다니게 했으나 말 잘 듣던 나도 그것만큼은 질색을 하고 몇 번 다니다 말았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열세 살 무렵에는 중이염 수술을 겪으며 나는 물을 더 피하게 됐다. 머리가 물에 잠겨 주위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일은 내게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던 내가 물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게 된 건 대학생이 된 이후였다. 더 이상은 여름철 물놀이의 들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동네 체육센터에서 강습을 받았다. 나름의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기 때문인지, 나이 먹고 겁이 없어져서 그랬는지 물에 대한 공포를 확실히 떨쳐낼 수 있었다. 한 번 그렇게 수영을 익히고 나니 수영장에서든 바다에서든 물 만난 고기처럼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언제 물을 두려워했냐는 듯 갈수록 물과 친해지며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았다. 수상레저에서 서핑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열쇠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참 많기도 했다.


눈 앞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봤다. 물을 먹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도 떠다니는 모습들이 내 어린 시절과는 정말 달랐다. 저토록 당연하고 즐거운 물놀이인데, 나에게는 한때의 공포이자 극복의 대상이었으니 이 얼마나 큰 차이인가 싶었다. 타고난 것이든 어떤 계기에 의해서든 누구나 내 어린 시절의 '수영하기' 같은 장애물이 하나쯤 있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아이는 또다시 내게 잠수해서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졸랐다. 꼬르륵 물속으로 들어가 눈을 뜨니 코를 막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천진난만했다. 그 모습이 퍽 부러웠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나를 자리로 불러서는 맥주와 치킨을 같이 먹자고 하셨다. 수영하는 중간중간 아무리 물을 마셔도 뭔가 부족했는데 맥주를 마셔보니 답이 나왔다. 출산, 육아와 관련한 아주머님들의 대화가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기억이다. 초대에 이어 맥주까지 주셨던 숙소 주인분들께 다시금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 후로도 얼마간 더 수영장에 둥둥 떠 있다가 쉬기를 반복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호텔 수영장에서 하루를 거의 다 보내려니, '아직 갈 곳도 많고 할 것도 많은데 이래도 되나'싶은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혼자서 넓은 풀장에 둥둥 떠서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에라~ 내일부터 더 열심히 돌아다니지 뭐'라는 나였다. 




물 밖에서 몸이 으슬으슬해졌을 무렵, 일행과 작별하고 호텔에서 나왔다. 물놀이는 물놀이였던지라 급격하게 배가 고파졌다. 생각나는 메뉴가 하나 있었다. 제주에서 유명한 음식인 동시에 수영 후에 먹으면 더 맛있을 음식, 고기국수였다.   



'장수물식당'.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와서 더 유명해진 맛집이었다. 평에 따라서는 '자매국수'보다 맛이 더 낫다고 알려진 식당이었다. 가격도 적당한 데다 국수에 곁들어 돔베고기도 추가로 나와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제주도에서 물놀이를 실컷 한 뒤에는 고기국수를 먹어야 한다.



배가 불러지니 더욱 나른해진 몸을 이끌고 굳이 또 카페에 갔다. 며칠 전에 잠시 들렀다가 마음에 들었던 '고망딱새'에 가서 같은 창가 자리에 앉아 해가 완전히 질 무렵까지 있었다. 사진과 글을 더 정리했고, 특별히 내일의 여행 계획을 미리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하루 전에 여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와서는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이틀 뒤에 제주도에 오겠다"는 통보를 받은 상황이었다. 


가족들의 방문이야말로 정말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반가우면서도 솔직히 저어한 기분이기도 했던 건, 남은 여행을 이제는 정말 손꼽아야 하는 기간에 다시 또 동행이 생기면 당연히 나만의 여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머니와 이모가 함께 오신다 하니, 건성으로 모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할수록 다이내믹한 나의 여행이었다. 그래, 어차피 내가 나서서 여행시켜 드리지도 못했는데 동생이 모시고 온다니 이 참에 가이드 역할 한 번 제대로 해보자 싶어서 그동안 좋았던 곳들의 기록을 쭈욱 살펴봤다.





뜻밖의 하루를 뒤로 하며 더욱 뜻밖의 내일을 맞이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하늘색에서 주황으로, 짙은 파랑에서 다시 보랏빛 저녁으로 물들어 가는 제주의 하늘 아래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먼 바다에 하나둘씩 켜지는 고기잡이배의 불빛을 신호로 슬슬 카페에서 일어섰다. 수영장 간이 샤워실에서 간단하게만 씻고 나왔기 때문에 얼른 들어가서 따뜻한 물로 완전히 씻고 자리에 눕고 싶었다.


여유는 부려도 부려도 더 부릴 자신이 있는 걸 보니 휴직한 지 한 달 만에 한량이 다 된 모양이었다. 어쨌든 호텔 수영장에서 실컷 놀고 고기국수를 맛본 행복감만으로 굉장히 단순해진 몸과 마음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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