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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Nov 24. 2017

제주 한달살기 Day24 : 세 여인과의 3박 4일_1

엄마, 이모, 여동생의 제주여행 가이드

# 엄마, 이모, 여동생 제주 도착  
# 세화 해변 - 섭지코지 - 함덕 서우봉 해변





오빠, 우리 제주도 가면 가이드 해 줄 거야?


이틀 전이었다.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랑쉬 오름을 오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나는 반갑게 받았다. 웬일로 안부전화를 다 해오는 녀석이 기특했다. 웬걸, 안부에 앞서 통보가 있었다. 자기가 곧 제주행 티켓을 끊으려 하는데, 혼자만 갈 수는 없고 이참에 엄마와 이모를 모시고 함께 여행하겠다는 거였다. 


내 동생은 행동파다. 일단 마음을 정하면 뒤도 안 보고 실행에 옮긴다. 통화 목소리를 들어보니, 걘 이미 제주행 비행기에 탑승한 듯한 말투였다. 회사에 연차부터 쓰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며, 지금이라도 나가고 싶다고 했다. 오빠가 부럽다고 며칠 전부터 제주도 제주도 타령을 하던 녀석이었다. 말릴 여지는 없었다.


우리 엄마는 평화주의자다. 지난번에 이모와 일본 여행을 했을 때 사촌 여동생(이모의 딸)이 가이드를 해 줘서 고마웠는데, 이번 제주 여행도 이왕이면 이모와 함께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들 일정에 부담 줄 생각은 없으니 우리는 신경 쓰지 말라는 평화로운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우리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신경 쓰지 말아야겠구나- 라고.


내가 엄마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하나 있다. "넌 여자를 너무 몰라~ 여자 친구한테도 그러니?" 뭘 그러냐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을 때가 많지만 어쨌든 내게도 요령은 있다. 엄마의 언어를 여자 친구의 언어로 바꿔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한 뒤 대응해야 잔소리 들을 확률이 그나마 줄어든다.


3박 4일 세 여인과의 제주 여행은 그렇게 순식간에 정해졌다. 다랑쉬의 풍경에 취해있던 나는 감탄과 탄식의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다. 드디어 혼자인 순간, 다시 함께인 일정이 잡힌 것이었다. 그것도 나와 가장 가까운 세 여인과의 동행. 제주도에 여자가 많긴 많다더니, 이런 식으로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공항에 도착한 여동생은 내게 짐부터 맡기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카메라만 들고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모습이 신나 보였다.



제주 하늘이 내가 본 어떤 날보다 청명했다. 어디든 모셔가면 좋아하실 만한 날씨였다. 일단 차를 타고 호텔에 체크인을 하러 이동했다. 네 명이 타고 트렁크에는 짐까지 다 실으니 엑셀에서 묵직함이 느껴졌다. 모닝아, 3박 4일만 너랑 나랑 힘 좀 더 내자.





세 여인의 숙소는 내가 지내는 선흘리에서 멀지 않은 함덕의 호텔로 정했다. 지난번 우정 여행 때 형과 함께 2박을 했던 곳이었다. 여러모로 괜찮길래 추천했더니 내 동생은 그 호텔에서만 3일 연박을 잡았다. 엄마와 이모와 동생이 최대 3인실인 방 하나면 됐다. 나는 원래대로 숙소에서 따로 자고 다음날 아침에 픽업하러 호텔에 가는 식으로 동행하기로 했다. 그러는 편이 숙박비도 절약할 수 있고 각자가 지내기에 편할 터였다. 


체크인을 하고 짐만 방에 올려놓은 뒤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내가 제주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들렀던 식당으로, 함덕에서 멀지 않은 동복리에 위치한 회국수 맛집이었다. 의미가 있을뿐더러 매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엄마의 기호도 고려했다. 혼자 먹었을 때 엄마를 모시고 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토록 빨리 이뤄질 줄은 몰랐다. 여럿이서 먹으니 이것저것 다 맛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식도락 여행에서 둘과 넷은 또 달랐다.

 


동부 해안을 따라 차를 몰아서 세화 해변으로 갔다. 동생 녀석이 '카페 공작소'를 틀림없이 좋아할 것 같았고, 화창한 날씨와 특히 잘 어울리는 바닷가는 바로 세화라고 생각했다.



쨍한 햇살 아래 여동생과 엄마와 이모가 나란히 뚝길 위를 걸었다. 양산을 깜빡했다며 아쉬워하는 엄마에게 내가 갖고 있던 밝은 색 우산을 쥐어 드렸고, 됐다고 손사래 치는 이모를 굳이 뚝 위로 올라서서 걷게 해 드렸다. 동생은... 알아서 잘도 돌아다녔다. 


  

벌써 몇 번씩이나 방문해 익숙한 세화 해변과 카페 공작소 앞 테이블이었다. 하지만 세 여인이 처음 접하는 풍경을 새로워하는 모습에 나는 그곳이 또 새롭고 좋았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간다 한들 완벽히 똑같은 시간의 똑같은 장소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의 색과 햇살의 강약과 바람의 세기 같은 것들의 어우러짐에 따라 동일한 공간에서도 느껴지는 정취란 제각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곁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여행의 기분과 색깔이 몹시 달라진다는 사실은 지난 2주 간의 경험을 통해 익히 확인한 바였다. 이번에는, 첫 방문지부터 셋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뭔가 뿌듯했다.

  


서로 한 번 마주 보고요~ 오~케이!


카페 공작소 앞에서 번갈아 사진을 찍었다. 동생과 엄마, 엄마와 이모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정겨워서 셔터음이 더 경쾌하게 들렸다. 그렇게 열심히 찍는 내 모습을 동생이 또 찍어주고 그 자리에서 서로의 사진을 확인했다. 순간을 기록하기에 참 편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카메라 앞에서 수줍어하는 엄마와 이모는 소녀들 같았다. 자그마한 기념품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고는 '아유 뭐가 이렇게 비싸~' 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엄마들의 모습으로 돌아오긴 했지만.(비싸긴 비쌌다)





다음으로는 섭지코지에 갔다. 사실 성산일출봉에 가려고 했으나 엄마와 이모가 이미 가본 곳이기도 한 데다 한참을 오르는 길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계획을 변경했다. 정문 주차장은 만차라서 휘닉스 아일랜드 쪽에 차를 대고 옆길로 돌아서 들어갔다. 미처 몰랐던 코스라서 섭지코지 또한 수차례 방문이었음에도 새로웠다.

 

  

내가 좋아하는 섭지코지의 배경을 골라, 각기 어울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넓은 풍경에서야말로 손가락 하트보다는 두 팔 하트가 어울리는 자매였고, 맨발로 잔디에 앉은 모습이 자연스러운 동생의 모습이었다.



글라스 하우스 뒤편까지 가서 꽃이 활짝 핀 화단을 구경했다. 이곳 역시 내가 기억해 뒀기에 구태여 모두를 더 걷게 한 거였다. 흠뻑 쏟아지는 햇살에 꽃들이 더욱 노오랬고 투명한 유리창에서는 빛이 났다. 그 가운데 세 명, 내 인생의 세 여자- 가 더욱 환한 모습이라서 마음이 계속 좋았다.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도 할레이션 효과가 생기는 오후였다. 휘닉스 아일랜드 앞에 펼쳐진 넓은 잔디를 가로질러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이 평화롭고 따스했다.

  




오후부터 시작한 일정이라 해가 벌써 기울었다. 오른편에 바다를 끼고 천천히 드라이브하면서 호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종달리 해안 어귀에서 풍차 사진을 찍겠다는 동생의 요청으로 차를 잠시 멈춰 세우기도 했다. 한창 카메라에 재미를 들인 녀석인데, 내가 그 재미를 잘 알다 보니 반갑기도 하고 예전 생각도 나서 좋았다. 카메라를 보여주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동생에게 내가 아는 한에서 답변을 해준 뒤에 꼭 덧붙인 말은 '일단 여러 장 찍어봐'였다.



함덕 서우봉 해변을 산책하는 것으로 그날의 일정은 마무리하기로 했다. 여럿이 다니다 보니 더욱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막상 저녁이 오니 아쉬운 마음이었다. 하늘이 워낙에 맑은 날이었던 만큼 저녁노을도 어느 때보다 예쁘게 물들고 있었다.   



나 역시 동생의 DSLR로 사진을 찍다 보니 폰카로는 미처 담지 못했던 하늘색도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관 오프닝 화면에 어울릴 법한 장면이라 특히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다. 바다 위로 하늘색이 절묘한 풍경에 이를 바라보는 커플의 뒷모습까지 더해져 심심치 않은 구성이 됐다. 게다가 하늘에는 짧고 긴 두 줄기 하얀빛이 눈에 띄는데,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이었는지 구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얼핏 보면 별똥별 같기도 하다.

 


서우봉 해변은 특히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어서 엄마, 이모와 함께 다니기에 좋았다.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하다가 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질 무렵에야 발길을 돌렸다.



저녁은 근처의 해녀식당에서 해산물 모듬을 시켰다. 살짝 부족한 듯 먹었는데 이미 가게가 문 닫을 시간이 다 돼서 아쉬운 대로 그냥 나왔다. 늦지 않게 각자 숙소로 돌아가서 쉬기로 했다.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체력의 기준을 나로 잡으면 안 되고, 어른들께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텔로 모셔드리고(동생은 모신 게 아닌데, 이런 경우에 우리말은 간결히 표현하기 힘든 게 문제라면 문제다) 숙소로 돌아와서 안부 전화를 했더니 세 여인은 호텔 1층 호프에서 간단히 맥주 한 잔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엄마와 이모의 체력을 너무 얕봤던 것 같다. 다음날은 더 열심히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정을 살펴봤다. 그러다가 나는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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