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다녀온 2박 3일 일본 소도시 여행의 프롤로그
일본 소도시 여행을 다녀왔다. 특별하다면 특별하고, 남들 다 하는 해외여행의 한 줄기라 한들 크게 섭섭하지도 않을 그런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하지만 내게 이번의 여행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했다. 이런저런 여건이나 목적을 따지기에 앞서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아 뒤도 안 보고 비행기부터 잡은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이미 완전히 새롭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현실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와는 상관없이 공항은 그 자체의 공간성 만으로 여행객의 가슴을 뛰게 해 주는 곳인 덕분이다. 일상의 터전으로서의 가장 큰 단위인 '국내'를 벗어난다는 해방감과, 우리 몸을 상시적으로 지배하는 물리 법칙인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향한다는 일탈감. 이 모두를 느끼게 해주는 국제선 비행기야말로 떠남에 적합한 이동 수단이 틀림없다.
공항 터미널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저마다 설레고 있을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순간만큼은 출발의 설레던 기분이 잠시 사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펼쳐진 활주로에 나타난 듬직한 비행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특별한 기분에 휩싸인다.
가장 친절하면서도 가장 당연한 듯한 승무원과 기장의 출발 안내는 영화 상영 전의 탈출구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종 재난에 대비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 맞지만 누구도 그러한 상황을 기대하지는 않기 때문에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륙의 굉음과 비행 안정권의 진입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다. 앞서 언급한 공항과 비행기에서의 해방감은 어느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탑승객의 마음에 녹아있다. 창가 좌석이든 통로 좌석이든 벨트에 매여 앉아있는 모두의 몸은 속박당해 있지만 각자의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날고 있다.
일본의 소도시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거리 간판의 언어가 바뀌었다든지, 차량의 진행방향이 반대라든지 하는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함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드르르륵 캐리어를 끌고 호텔로 향하는 길의 유난한 소리만큼이나 나의 호기심과 즐거움은 그곳이 일상인 현지인들에 비해 소란스러웠다.
미안하지만(당시에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간혹 마주한 한국인들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둘둘 셋셋 소란스럽거나 혼자 아주 심각하게 지도를 보고 있던 동포 여행객들은 명동에서 마주한 중국인 관광객들을 떠올리게 했다. 딱히 불특정 다수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저 그런 '느낌'이었음을 고백할 뿐이다.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철저하게 현지만의 분위기에 취하고 싶던 나의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열차를 타고 일본의 작은 마을로 향한다. 시설로만 비교하자면 한국의 무궁화 열차 정도지만, 그곳의 재래식 열차가 바다를 따라 달리며 내는 삐그덕 소리는 '낡음'이 아닌 '전통'으로 느껴진다. 반대편 좌석에서 홀로 창밖을 바라보는 일본인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제멋대로 '고독'의 원형을 떠올린다. 무라카미 하루키였다면 이런 풍경을 어떻게 표현할지 몹시 궁금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순간, 내 눈 앞에는 또 한 분의 노인이 등장한다. 그는 원래 있던 노인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는다. 마스크를 쓴 그의 모습은 조금 더 쇠약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흑백 필터를 끼고 바라본 일본인 노인의 고독이 배가 되지는 않는다. 혼자보다 둘의 모습은 어쩐지 덜 쓸쓸해 보이기 때문이리라. 창 밖의 푸른 바다가 한국에 절대 없을 고유의 풍경이듯 두 노인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이곳은 일본 남규슈의 이부스키행 열차 두 번째 칸,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여행의 순간이다.
2박 3일의 잊지 못할 순간들은 이것 말고도 많지만 여행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서둘러 꺼낼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좋은 여행은 여행하는 순간들의 여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난 후에 감상이 무르익을 충분한 시간까지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좋은 여행기도 자연스레 쓰여진다. 기록을 급히 쏟아내면 자칫 너무 뜨거울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늦게 작성하면 아무래도 내용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공항과 열차에서의 감상만큼은 재빨리 써두는 건 두 장소의 상징성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들에 비해 사진이 많지도, 에피소드가 유별나지도 않은 이동 수단에서의 기억은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짧은 글로나마 확실히 붙잡아 두고 싶다. 일본행 비행기와 이부스키행 열차, 여행자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기에 또한 누구든 지나치기 쉬운 곳들에서 나는 이미 도착 장소 뿐만 아니라 다음 여행까지를 꿈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