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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Apr 03. 2018

운전, 잘 하시나요?

도로 위에서는 누구나(특히 남자들은) 자신의 한계를 종종 마주한다.



남자들은 안다. 자신의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그곳은 일반적인 활동 반경에 비한다면 매우 비좁지만 그런대로 아늑하고 편안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철저히 동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따금 찾아오는 정적인 순간들이 못 견디게 괴로워지기도 하는 공간이다.


바로 그곳, 차 안에서 남자는 기어코 자기 자신의 깊숙한 내면을 마주하고야 만다.





십수 년 전.


초보 운전자에게 도로는 무법천지에 다름없었다. 그 어떠한 사회적 공간보다 무자비한 도로 위에서 이제 막 운전을 시작한 남자는 타인들의 야성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릴 때부터 자전거, 스케이트 등 바퀴 달린 것들을 그럴듯하게 몰아봤다고 아무리 자부해봤자 차 안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그토록 위협적으로 자신의 몸을 이끄는 동시에 타인의 의지를 물리적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덩치는 자동차 이전에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운전면허도 수월하게 따고, 아버지 덕분에 공터에서 제법 연습도 해 봤던 나였다. 동네 마트에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는 일로 시작한 실제 운전은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끼어들기에, 주차에, U턴 등등 도로에서 시시각각 마주한 미션들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나오기 일쑤였다. 비라도 많이 내리는 날이면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바삐 움직이는 와이퍼만큼이나 불안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틈에 뿌예져 있는 앞유리 성에 때문에 에어컨/히터 버튼을 찾으면 그건 또 왜 그렇게도 안 보이던지.



첫 사고는 다행히 경미한 끼어들기 실수였다. 사이드 미러를 충분히 살핀다는 게 그만 뒤차를 의식하다가 옆 차선 버스의 옆구리를 긁어버렸다. 당황한 스무 살 청년에게 쏟아내던 버스 기사 아저씨의 불평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내 차 아닌 아버지의 차를 운전했던 당시의 나는 온전한 운전자라고 하기에는 그처럼 어리숙했다. 방향 지시등을 충실히 켜고 다니고, 그래도 뭔가 실수를 하면 어쩔 줄 몰라하며 비상등을 켜기 바쁘던 '깜빡이'시절이었다.

 



십수 년 후.



아니, 거기서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떡합니까?


창을 내리고 내가 소리친다. 경적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아 잠시 차를 멈추고 상대방 운전자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다.


그냥 갈 길이나 가지 뭘 쳐다보고 소리를 쳐!


상대 운전자가 창을 내리고 외친다. 덩치가 제법 좋은 젊은 남자다. 되레 같이 윽박지르는 걸 보니 사과를 받기는커녕 싸움이 커지기 쉬워 보인다. 몇 마디 더 붙여 보고는 서로 언성을 높인 뒤라야 결국에는 창을 올린다. 아뿔싸, 상대가 차에서 내리려고 한다. 괜한 시비로 몸 상하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겠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난다. '설마 이 정도로 쫓아오지는 안겠지...?' 백미러에 그 남자의 차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10년 이상의 운전 실력이 제법 능숙했지만 분노 조절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기분이었다. 한창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가 그랬다. 차를 타고 급히 이동하던 내게 있어 다른 초보 운전자들은 답답한 존재요, 능숙한 운전자들은 얌체 같은 존재였다. 어쩜 그렇게 깜빡이도 안 켜고 불쑥 들어오는지, 도대체 저 속도로 왜 1차선을 고수하며 앞을 가로막는 건지. 차 안에서 나는 지극히도 예민했다.


이대로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남자의 성격을 알려면 운전할 때의 모습을 보라는 말이 이따금씩 떠올랐다. 다행히도 조수석의 여자 친구는 나의 성질을 잘도 이해해 줬지만, 어느 순간 도저히 나 자신이 납득하지 못할 만큼 운전석에서의 나는 비정상에 가까워 보였다.


평일 동안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답시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느라 또 다른 피로를 쌓은 주말의 끝자락이 특히 그랬다. 일요일 밤, 다음날 출근 시간이 다가오는 스트레스까지 더해져 나의 예민함은 극에 달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로가 막힐 때면 차 안에서 짜증은 결국 폭발했다. 평소에는 주의하던 급출발과 급정거를 일삼는 건 물론이요, 얌체같이 끼어들고는 비상등을 켜지 않는 운전자를 향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일쑤였던 것이다.


보복운전 통계 (2015년 JTBC 방송자료)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완전히 나아졌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화나는 상황들은 있지만 결코 예전처럼 씩씩거리지 않고 그러려니 한다. 나이 지긋한 어른이 된 것도 아니요, 로또에 당첨이라도 된 건 더더욱 아니다만 어떻게 해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걸까?


일단은 타인에 대한 실망보다 자신에 대한 실망이 커졌던 게 첫 번째 계기라고 본다. 어느 정도 자기 성찰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위에 소개한 시비의 예처럼 다른 사람과 악다구니를 쓰고 난 뒤 후회를 하는 게 정상이니까.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화가 나더라도 그 자리가 끝나면 결국에 남는 건 자신이 지닌 화의 찌꺼기일 뿐이니까. 상대가 더러운 걸 내게 던졌다고 한들 그걸 피했으면 깔끔해지는 건데 나도 같이 더러운 걸 그러모아서 던지다 보면 가장 더러워지는 건 바로 내 손이 아니겠는가. 


두 번째로는 또한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나의 상태를 객관화해서 돌아봤던 덕분이다.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철저하게 그 사람의 '상태'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나는 반복되는 경험으로 내 상태를 진단했다. 주말, 일요일 오후에 특히 차 안에서 화가 급증하는 걸 깨닫고 나니 왜 그런지를 살피게 됐는데 그 이유라 봐야 단순하고 뻔했던 것이다. 그렇게 원인을 단순화하고 나니 해결책 또한 간단했다. 이를테면 일요일 늦은 시간에는 굳이 차를 사용하지 않는다든지, 다음 주로 미루던 일을 그 전 주 금요일에 미리 마무리 해 놓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휴가도 좋고, 심지어 이직이나 휴직도 좋다. 직장이야 그만두거나 바꿀 수 있지만 하루아침에 운전을 포기하거나 운전기사를 보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여자가 남자를 고를 때는 취중 상태를 확인하면 좋긴 하다. 술이란 건 화학적으로 그 사람의 내면과 본성을 확실히 이끌어내 주는 덕분이다. 하지만 남자가 술을 못 먹는다든지 좀처럼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면 반드시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보기를 나는 권한다. *다카르 랠리처럼 극한의 경주에 참여할 필요도 없다. 그저 서울에서 가평이나 양평, 그도 아니라면 주말의 서울 도심을 두어 시간 운전하는 것만으로도 운전자의 본성은 반드시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다카르 랠리 : 세계 최고 권위의 자동차 경주대회. 명성만큼이나 최악의 운전 조건으로 이름이 나 '지옥의 랠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뻥 뚫린 고속도로라면 과연 얼마만큼 속도를 내는지 볼 일이다. 제한 아닌 제한 속에서 그가 밟는 액셀 페달의 기울기만큼 운전자의 마음도 안정적인 성격에서 화끈한 정도로 기울어 가는 것이다. 어느 쪽이 반드시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조금 답답해도 안정지향의 사람이 좋다면 고속도로에서도 100에서 110킬로미터를 준수하는 사람을 고르면 될 일이고, 약간 불안해도 화끈한 사람이 좋다면 그보다 액셀을 더 밟는 사람도 크게 상관은 없다. 어느 쪽이든 앞차와의 거리라든지 지나친 과속을 주의하는 일은 운전자의 기본 소양이므로 전제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화끈하게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좀 위태로운 남자인 건 분명하다.

꽉 막힌 도로에서는 이따금씩 운전자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면 그의 참을성은 거기까지인 거다. 조수석에서든 운전석에서든 똑같이 지루하고 답답한 명절 연휴 귀성길의 경우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조수석에 앉은 이는 운전자가 자신에 비해 어떠한 상태인지를 가만 살펴보는 것만으로 그의 인내심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다 다른 차가 앞에 끼어들었을 때 그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지가 바로 그 사람의 현재 여유 상태를 드러낸다. 직장에서든 집에서든 무언가에 시달리는 걸 뻔히 안다면야 잘 다독여 보기라도 할 일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에도 클랙슨을 빵빵 거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여러모로 여유가 부족한 남자다.

  



남자들은 모른다. 언제 자기가 방심했는지를. 간혹 방문하는 레스토랑에서 여자를 위해 의자를 빼 주는 일쯤은 미리 대비하기 쉬웠겠지만, 늘 잡던 운전대 앞에서 자신이 어떠한 표정을 지었는지는 도무지 기억하기 힘든 일이다. 나이가 찼음에도 미숙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부족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능숙함에 감춰진 난폭함이 드러난다면 그 남자에게는 필시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게 맞다. 부족한 게 있으면 채우면 되는데,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한다. 채우는 건 남이 해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고치는 건 본인만이 해낼 수 있다.


오늘도 자신의 차 안에서 스스로의 깊은 내면을 마주한 남자들, 둘 중 하나의 길로 가고 있을 터다. 그대로 돌진하거나, 내비를 수정하여 다른 길을 택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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