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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Mar 08. 2018

Nice to #Me too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거나. metoo 에 대한 한 남자의 이야기




요새는 실시간 검색어에 아는 이름만 나오면 깜짝깜짝 놀란다. 최근에는 원로 배우 이순재 씨의 이름을 보고 흠칫 놀랐던 기억이다. 설마...하며 클릭해서 나오는 뉴스를 보고는 굉장히 안도했다. 수많은 연예인과 권력자들의 악행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Metoo 의 세상, 그래서 나도 한 마디쯤은 보태본다.



 

나는 좋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여자 동기들과 선후배 사이에서 '매너남'으로 불릴 정도로 예의를 다하던 나는 그러나 남자들끼리 있을 때는 걸쭉한 농담을 마지않는 그런 남자였다. 집안에서는 네 살 터울 여동생의 귀가가 조금이라도 늦을라치면 부리나케 전화를 걸어 들어오라고 단속하는 보수적인 오빠였던 반면, 부모님에게는 여자 친구와의 1박 여행을 당당하게 알리던 자유분방한 아들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나였다.


야한 농담은 남자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익히 친숙했던 '남자들만의' 소통 방식에 다름없었다. 사실 난 그때는 또래에 비해 그런 대화나 자리에 잘 끼지 않는, 소위 모범생이자 바른생활 청소년이었다. 흔한 욕지거리조차 친구들에 비해서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으니, 나름대로는 점잖은 애어른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대학에 진학해서, 성인이 되어서 오히려 철없이 시답잖은 농담들과 편향된 성적 대화를 마음껏 쏟아냈던 건 그게 바로 '자유'라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다. 나름의 변을 덧붙이자면, 외려 이성들을 더 헤아리고 그들과 함께 어울릴 자신이 있었기에 철저히 동성들과 있을 때만 언어유희를 사교적 자신감의 발로인마냥 활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마음껏 비틀고 마음껏 웃을수록 남성性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소위 '남자들의 세계'에서 어떤 우위 내지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나는 '성적 농담'을 무기 삼아 후배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선배들만큼은 철저하리만치 혐오했다. 특히 동아리 활동에서 겪은 일들은 나의 그런 성향을 확실히 확인시켜 주던 계기였다. 여자 동기들이 싫어하고 나 또한 멀리하던 사내들은 비슷한 언행을 일삼는 같은 무리였다. 후배들을 잔뜩 불러놓은 술자리에서 생전 처음 겪는 원색적인 여성 비하 발언들을 쏟아내는 형들을 보며 나는 그들의 권력이, 그들의 삶이 측은했다.




인간적인 존중마저 포기하고 관계를 끊은 그들에 대한 기억은 논외로 하더라도,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한 술자리는 20대 중반의 어느 친한 남자들의 모임이었다. 졸업을 앞뒀거나 졸업한 동기와 선후배 예닐곱이 학교 근처의 술집에서 모처럼 만난 자리는 어느 때보다 시끌벅적했다. 나 역시 모처럼 만난 친한 형 동생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술자리는 무르익었다. 



여지없이 대화 주제가 '여자'로 이어지던 참이었다. 특히 나와 친하던 동생 한 녀석이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와의 내밀한 관계조차 주저하지 않고 얘기하던 그는 이윽고 말도 안 되는 성적 농담을 뒤섞기 시작했다. 주위의 친구들은 맞장구를 치며 아주 즐거워했다.


그날따라 나는 대화에 정말 단 한 번도 끼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너무나 외로워서 혼자 바람을 쐬러 나갔을 정도였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말이다. 혼자 갑자기 고상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대체 이 자리에 난 왜 있는 걸까, 예전의 나도 저랬을까. 그날 집으로 오며 마음을 어지럽히던 불쾌감으로 나는 그날 이후 최소한 먼저 음담패설에 앞장서지는 않겠노라 다짐했다.




이후의 직장 생활에서는 그래서 '남자들'의 대화를 주도하지 않고 적정선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이미지'로써 '저 친구 참 재밌다'는 권력을 선점하는 데서 일종의 희열을 느끼는 일을 포기하기란 힘들었다. 소위 '사회생활'로 뭉뚱그려지는 새로운 구조의 인간관계에서 나는 또다시 친밀함을 쌓아가고자 익숙한 야한 농담을 어느새 다시 활용하고 있었다. '섹드립'이란 말이 방송에서 아주 자연스러울 정도로 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해방'되는 듯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반가울 지경이었다.


어쩌다 연예인 신동엽과 비견이라도 될라치면 나의 자부심은 더욱 커졌다. '그래, 성적 농담이란 이성이 불쾌하지 않는 선에서의 줄타기야' 라며 나는 거리낌 없이 남직원들과, 또한 여직원들과 어우러졌다. 





그런 나라 할지라도, 결국은 위선자였음을 고백하는 건 어디까지나 말로 지은 죄에 대한 반성이다.


근 한 달 동안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미투 운동을 지켜보며, 나는 나 자신의 위선을 위와 같이 곱씹어 봤다. 때로는 매너남으로, 때로는 마초남으로 왔다 갔다 하던 나는 그러나 알게 모르게 남자로서의 권력을 포기하기 싫었던 거다. 아니, 오히려 역차별이라 여겨지는 일들에 분개하며 '어디 여자가?'라는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풍조에 가담했거나 그도 아니라면 방관했던 것이다. 아무리 지킬 박사가 선한 사람이라 해도, 다른 인격체인 하이드가 죄를 짓고 다닌다면 그 몸뚱이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의 고백은 딱 여기까지다. 여성에 대한 성추행, 성폭행은 남자들끼리 밀실에서 주고받는 야한 농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직접적 범죄이기에 나는 더욱 당당히 권력자들의, 인면수심 마초남들의 위선과 악행이 낱낱이 밝혀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남자들은 대개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위선을, 자신이 '잠재적' 미투의 가해자였을 수도 있던 세상에 드디어 적절한 브레이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는 누군가의 어머니와 여동생, 누나들의 억울함이 드디어 밝혀지는 계기이자 우리의 딸들이 더욱 마음 편히 살아갈 사회로 나아가는 옳은 방향임을.





'일부 변태남들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우리가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나?'라고 되묻는 동지들이여, 안다. 내가 뭐 대단한 놈은 아니지만, 고해성사 비슷한 얘기를 한 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성찰일 뿐이다. 나 역시 지극히 평범한 남자로서 '남자라면 OO해야지' 라는 또 다른 사회적 억압의 틀 안에서 고군분투 해 왔단 말이다. 물론 말도 안 되게 역차별을 받는다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겠지만 현재의 미투 운동이 여성에게만 열려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성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여성들이 오랜 시간 사회적 차별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부터 바로 잡지 아니하면 양성 평등의 길은 요원해 질 수밖에 없단 말이다.


미투 운동을 놓고 남자 대 여자의 성대결 구도로만 몰아 가는 일부 언론의 프레임은 그래서 편협하다. 클릭수를 위해 정의(justice)를 함부로 정의(definition)하는 펜 권력의 위선 또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적폐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바 아니던가. 우리가 미투 운동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간접적인 경험으로 인해 피해 의식을 지녔을 수도 있는 여성들 모두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세다. 그리고 이는 여성들의 연대만이 아닌 남자들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여성은 무조건 약자여서가 아니라, 약자일 수밖에 없던 여성을 위해 남성들부터가 올바로 강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동안의 위선을 거두고 이제 진짜 선을 행하기 위해 성숙해 지려 한다. 앞으로의 내 아내에게 더욱 당당하도록, 태어날 내 딸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작금의 세태는 그래서 혼란스럽지만 어쨌든 환영해야 할 성장통의 과정이 아닐까. 남자라서 희망한다, Nice to Me t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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