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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Mar 05. 2018

삶은 팀추월일까, 매스 스타트일까?

동계올림픽의 여운에 기대어 풀어보는 인생 레이스 이야기 



누군가에게 실망하거나 서운한 감정은 그에게 품었던 기대치에 비례하여 커진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는 대개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늘 봐왔거나 앞으로도 봐야 할 이로부터 비롯된다. 낯선 타인의 불친절함은 그 자리에서의 불쾌감으로 끝나곤 하지만, 익숙한 사람과 겪는 갈등이 당사자들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건 전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어떤 요소의 결핍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 역시 돌아보면 타인으로부터 서운함을 종종 느껴왔다. 그것도 꽤나 자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대개의 실망은 스스로만을 질책하기에 벅찬 나머지 조금이라도 상대가 나를 더 헤아려 주고 원하는 대로 해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됐다. '어? 난 지난번에 그렇게나 했는데, 얘는 이렇게 밖에 안 하네?' 여기서의 '그렇게' 혹은 '이렇게' 란 물질적인 요소일 때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어떤 말이나 태도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친구 관계에서든, 이해관계에서든 거의 모든 일들을 '팀추월' 경기처럼 인식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맞다. 얼마 전 성황리에 끝난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많이 회자된 그 팀추월 빙상경기 말이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기는 어느덧 꽤 진행되어 뒤를 돌아보면 많은 이들의 모습이 보이고,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저 앞에 아른거리기도 하는 요즘이다. 가만 보면 자신의 경기를 마치 쇼트트랙인 마냥 숨 가쁘게 달리던 이들 중에는 벌써 코너를 몇 바퀴나 돌고도 여유를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진작에 넘어져서 앞을 따라잡을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도 있다. 나 역시 한때는 저렇게 주저앉아 망연자실했던 기억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달릴 건 500미터 쇼트트랙이 아닌 1만, 아니 10만 미터 이상의 길고 긴 트랙이겠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얼음을 디뎌 온 것 같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 차례 넘어지고도 결국 레이스를 완주할 뿐만 아니라 경쟁자들을 앞질러 버린 여자 쇼트트랙 계주야말로 그러한 장거리 레이스의 이상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그런데 한창 스케이트를 타면서도 아직 내가 달리고 있는 이 종목이 뭔지 헷갈린다는 건 여전한 문제다. 아무튼 쇼트트랙은 아닐 거라 여기긴 했다만, 이제 와서 새로 알게 된 팀추월 종목에만 빗대어 보려니 내가 너무 순진했나 싶은 것이다. 마지막 주자의 레코드로 결과가 평가되기에 주자 셋이서 서로를 끌어주고 밀어주며 장거리를 질주하는 팀추월 빙상경기. 이 종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건 아름다운 팀워크였기 때문에 마지막 주자의 쓸쓸한 뒤쳐짐을 놓고 굉장한 논란이 되었듯, 나와 내 주위를 팀추월에 비견해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많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게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뒤쳐진 것 같아 앞선 동료의 도움과 따뜻한 격려를 원하다가도, 나 자신을 한 명의 온전한 스케이터로 놓고 보면 그런 기대는 너무 나약한 것 같아 이를 악물고 쫓아가야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눈 앞의 코스는 너무나 다양해서 과연 내가 일직선 상에서 쳐져 있다고 보는 게 맞는지, 어쩌면 내 코스에서는 이미 앞서 있는 게 아닐지 막연한 자신감이 솟기도 하는 것이다. 

 



팀 혹은 국가의 영광을 위한 삶이 아닌 개인의 도전과 성취가 비로소 더 존중받는 오늘날, 그래서 나는 요새 주위를 둘러보면 인생이 팀추월보다는 매스 스타트 종목에 가깝게 보인다. 운 좋게 같은 국적의 건실한 후배라도 함께 결승에 올라준다면 팀플레이가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매스 스타트란 어디까지나 개인 종목인 장거리 레이스이며 얼음 밖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경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우르르 동시에 출발해서는 배점이 다른 각 코너에서 누구는 기를 쓰고 득점하고 누구는 이에 상관없이 최종 골인 지점까지 페이스를 조절하고. 올림픽에 새로 도입된 빙상 종목이었던 매스 스타트는 그 낯선 이름만큼이나 지켜보는 이들에게 어수선함을 안겨 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기의 과정과 결과를 놓고 벌어진 많은 논란은 올림픽이 끝난 지금까지도 말끔히 정리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인식대로 기억되고 있다.


같이 달릴 줄 알던 동료들이 저마다 다른 페이스로 나아갈 때는 누구라도 혼란을 느끼지 않을까? 게다가 철석같이 팀추월 경기인 줄로만 알고 달리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게 여러 명이 뒤엉켜 달리는 매스 스타트인 걸 뒤늦게 깨닫는다면 그야말로 '멘붕'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혼자서 빨리 가기보다는 함께 멀리 가겠습니다'라고 했던 구직 면접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당시에 내가 느꼈던 면접관의 조소는 과연 면접자의 어수룩함에 대한 비웃음이었는지 명제 자체의 진부함과 순진함에 대한 냉소였는지는 아직도 판단이 잘 서지를 않는다. 불합격도 있었고 합격도 있었으니 어쨌든 그 발언 자체가 면접의 당락을 좌우한 요소도 아니었던 것 같고.


한 가지 간과한 게 있기는 한 듯하다. 함께 가고 말고야 말로 내 의지에만 달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개인의 신념이란 상황에 따라 흔들리기 쉬울진대, 타인에게 나의 일시적인 신념을 강요하기란 더더욱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야 바른말이지, 인생을 어찌 팀추월이냐 매스 스타트냐 하는 식으로 단일 종목처럼 여길 수 있으랴. 우리 모두는 타인으로부터 함부로 규정지어질 수 없는 저마다의 개인 종목이자 팀 종목을 동시에 질주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타인에 대한 기대의 '크기'로 실망감을 조절하느니 기대의 '방향' 이 자신을 가리키도록 바꾸면 어떨까. 그리하여 성취도 실망도 스스로가 더욱 책임지고 당당해질 것. 그럼으로써 과정에서든 결과에서든 누구의 탓도 하지 않을 것. 그게 바로 개인 종목(매스 스타트)에서든 팀 종목(팀추월)에서든 성숙한 프로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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