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돌 Feb 01. 2018

그렇게 남자는 주부가 되어간다.

일주일에 한 번쯤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있는 아들 이야기



돌이켜 보면 심부름을 썩 잘 하는 아들은 아니었다. 집안일은 웬만해서는 직접 다 하시는 부모님이 '넌 그냥 네 일이나 잘 하라'는 주의였던 덕분일 게다. 솔직히, 뭘 좀 시키거나 부탁해도 잘 안 하는 편이긴 했다.


그런 내가 각종 생활용품이며 식재료를 직접 사 볼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학교 앞에서 몇 달 자취를 했을 때조차 그리 멀지 않던 본가에 가끔 들러 어머니가 사놓으신 먹을거리며 생필품을 잔뜩 챙겼으니 말이다. 어쩌다 급히 필요한 물건을 사러 편의점에 가는 일 말고는 내게 그래서 '장보기'란 전적으로 엄마의 영역이었다.

   



요즘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서 가까운 대형 할인마트에서 식재료 등을 산다. 독립해서 살게 됐다거나 결혼 후 가사 분담을 한 건 아니다. 단지 엄마가 당분간 장을 보러 다니실 수 없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니라면 별 거 아니기도 하고, 심각하다면 또 어떤 면에서는 그런 편이기도 하다만 아무튼 아들인 내가 세 식구의 장보기를 책임지게 된 것만이 담담한 사실일 뿐이다.

물론 요즘은 전화 주문이든 인터넷 주문이든 집에서 편히 장바구니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많지만, 확실히 눈으로 직접 골라 담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나는 기꺼이 차를 타고 마트로 향한다. 포장된 가공 제품들이야 그렇다 쳐도 육류나 과일, 야채 등은 절대적인 신선도를 떠나서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사 먹어야 마음이 편하다.




일단 지령은 엄마가 내린다. 마트 전단지를 통해 살 목록들을 정하고 메모지에 적어서 내게 주신다. 종이 한 장을 주머니에 넣기가 그렇게 귀찮아서 그냥 카톡으로 보내달라고 해도 우리 엄마는 꼭 손글씨를 써서 준다. 그게 편하시단다. 난 그걸 또 굳이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서 종이를 버린다. 엄마와 아들 어느 쪽이 더 고집이 있는지는 당사자로서 내가 단정 짓기가 힘들다.




며칠 전에 산 물품들의 목록은 대략 이러하다. 

우유(저지방) 2팩
요구르트(프로바이오틱스 함유) 
바나나(두 송이)
시리얼 
딸기(1박스 특가상품),
무(상태 봐서 크면 1개, 작으면 2개) 
생수(큰 거 6병 묶음)


딱히 살 때 주의를 요할 만한 건 없지만 이런 식으로 식재료들을 사다 보니 나름대로 요령이라는 것도 생기고 잘 샀을 때의 보람 비슷한 걸 느끼고 있다. 처음에는 구체적인 금액과 상표까지 지정해서 알려주던 엄마도 이제는 내가 물건을 직접 보고 알아서 판단해서 산 걸 믿는 눈치다. '느그 아빠보다는 훨씬 꼼꼼하게 비교해서 사 오는구나'라는 말씀이 칭찬이라면 말이다.



어렸을 때, 굳이 냉장실 안쪽의 우유를 골라 담으며 유통기한이 더 좋은 걸 사는 거라던 엄마를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차피 거기서 거긴데 엄마도 참 피곤하게 산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던 그런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냉장실 저 안쪽까지 손을 집어넣어 꺼낸 우유를 카트에 담는다. 같은 상품이라도 진열에 따라 많게는 3일, 적어도 하루의 차이가 나는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제일 신선한 제품으로 고르고 나면 어쩐지 뿌듯하달까. 마트 입장에서야 재고 정리의 문제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소비자 개인이 대형 할인마트 자산의 수만 분의 일까지 배려해서 눈에 보이는 신선 제품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라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 동네 마트의 바나나는 무척이나 저렴한 편이다. 같은 제품에 수시로 '초특가'를 지정해 팔기 때문에 오히려 제 가격일 때 사는 게 바가지를 쓰는 기분일 정도다. 물론 대부분의 마트들이 거뭇거뭇 일부가 무른 상태의 바나나에 할인을 적용해 처분하겠으나, 이곳은 그렇지 않은 푸른 바나나조차 할인할 때가 많아서 좋다. 그래서 나는 보통 약간 덜 익은 상태의 두 송이를 골라 사는 편이다. 어차피 집에 놓아두면 알아서 잘도 까매진다.




이런 식으로 자주 사는 물건들에 나름의 구매 질서를 정해 가면서, 간혹 처음 사보는 것들은 가격이나 상태 등을 엄마에게 전화로 물어 물어 사다 보면 장보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예전만 해도 무 하나의 적당한 크기가 대체 어느 정도고 가격은 얼마인지 짐작조차 못한 상태로 할인 상품이 무조건 좋은 줄 알았다면, 이제는 크고 실하며 푸른색이 적당히 섞인 무를 골라 담고 가격도 평상시 수준 이하라면 더욱 만족해한다. 아무리 대형 마트라 한들 같은 코너를 계속 지나다니다 보면 '보통 수준'의 가격이 어떠한 지도 저절로 익히게 되는 것이다.



상추도 나는 무조건 푸르딩딩한 게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얼마 전 추가로 알게 된 바, 청상추 말고 거뭇거뭇한 빛이 도는 적상추가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선호도가 높은 상품이라 적당히 섞어서 사는 게 좋았다. 차이를 묻는 나의 질문에 엄마도 정확하게 답을 하지는 못했으나 어쨌든 거무튀튀한 게 무조건 덜 신선한 줄로만 알다가 청상추 적상추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건 나로서는 한 걸음 나아간 게 분명하다.


어쩌다 칫솔이나 목욕 용품 같은 걸 살 때는 편의점에서 샀을 때와의 가격 차에 깜짝 놀라곤 한다. 이래서 엄마가 그렇게 잔뜩 사뒀구나 싶을 정도로, 묶음 가격이 너무나 저렴하기 때문이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엄마에게 잔소리할 수 있던 게 바로 '필요에 의해서 사는 게 아니라 가격을 보고 사면 오히려 낭비다'는 철학이었는데, 요새 그게 무너지고 있다. 이래서 역시 어른들에게는 함부로 잔소리하는 게 아닌가 보다.

   



어렸을 때 가끔 들어본 엄마의 장바구니는 턱없이 무거웠던 기억이다. 기껏 들어주면서도 뭘 이렇게 많이 샀냐느니, 또 유통기한 넘겨서 못 먹을 정도로 잔뜩 샀냐느니 투덜투덜하던 살갑지 못한 아들이었음을 다시 고백한다. 뭐, 지난 과오를 반성한다거나 죄를 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굉장히 일반적인 '아들놈'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털어놓는 경험담이긴 하다만. 



그에 비해 차를 타고 집까지 2L짜리 6묶음 생수도 거뜬하게 나를 수 있는 나의 장보기란 얼마나 편하단 말인가. 기껏해야 그에 더해 장바구니 하나 다른 한 손에 마저 들고 주차장에서 집까지만 뒤뚱뒤뚱 할 정도의 노동이니, 마트에서 물건을 골라 사는 재미에 비한다면 그 정도쯤이야. 


만약 초등학생이던 내게 운전면허증이 있었다면 엄마가 그 무거운 걸 들지 않도록 픽업해 드렸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만, 그 시절 엄마의 수고로움에 고마워하기 위해 굳이 지금 내게 주어진 편의를 포기할 생각은 단언컨대 없다. 그저 예전의 엄마에게 감사하며, 지금의 엄마에게 최소 비용 최대 만족을 드리고자 주문받은 물건들을 빠짐없이 사고 영수증을 잊지 않고 챙겨 드릴뿐이다.




그렇게 아들은, 남자는 주부가 되어간다. 엄마가 맡았던 많은 영역 중의 극히 일부일 뿐이지만, 적어도 마트에서 장을 보는 동안은 얼마만큼 그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기에 소중한 시간이다.


아직도 엄마는 아들에게 장 봐오기를 '부탁'하신다. 어차피 할 거면서 이러쿵저러쿵 내뱉는 아들의 태도 때문일 거라 짐작한다. 다음에는 집에 뭐가 필요한 지 좀 봐 뒀다가 알아서 사 갈까도 싶다만, 그러다 괜히 불필요한 지출을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엄마의 의중을 거스르는 일이 될 테니, 당분간은 그저 엄마의 메모지에 적힌 물품만 충실히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아무리 후하게 평해도 아직은 주부 '인턴'수준일 텐데, 도제 기간에는 역시 시키는 거나 잘 하는 게 여러모로 속 편한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