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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돌 Jun 21. 2018

배터리 사회

보조배터리의 보조배터리라도 가지고 다녀야 하는 걸까.



외출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있다. 

바로 휴대폰 배터리의 잔량 표시(%)다. 약속 시간이 빠듯해 부랴부랴 집을 나서다 보면 챙겨야 할 것들을 빼먹을 때가 종종 있지만, 휴대폰 배터리만큼은 좀처럼 잊지 않는 편이다. 아니, 집에서도 수시로 화면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배터리 상태를 모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며칠 전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휴대폰 배터리 30%가 채 안 된 상태로 집을 나섰다. 약속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미처 충전해 놓을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방 안에 넣어둔 보조 배터리를 떠올리며 안심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카톡도 주고받고 월드컵 관련 동영상까지도 찾아봤다. 충전은 이따가 영화를 보는 동안 보조배터리로 해 놓으면 충분할 것이기에 마음 놓고 배터리를 사용한 것이다. 덕분에 영화관에 도착해서 친구를 만났을 때는 이미 배터리 잔량이 10% 수준까지 떨어져 있었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보조배터리를 꺼내어 케이블을 휴대폰에 연결했다.



아차차차. 

보조배터리의 전원 버튼을 눌러봐도 불빛 한 칸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지난번에 다 써놓고 충전해 놓지 않은 상태였던 거다. 이럴 수가, 충전 케이블은 가지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동영상 같은 건 보지 말고 배터리를 아껴놓을걸. 이어지는 후회를 일단 접고 휴대폰 설정에 들어가서 '저전력 모드'를 실행했다. 이제부터 휴대폰은 꼭 필요한 연락이 오지 않는 이상 보지도 않기로 다짐하면서(대기화면 켜기도 아까우니까). 그나마 잠시 뒤에 영화를 보러 들어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적잖이 불편했을 상황이었다. 



    

내 경험 상 휴대폰 배터리 수치에 따른 심리 상태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40% 미만 - 불안
30% 미만 - 초조
20% 미만 - 긴장 
10% 미만 - 예민(이때부터 오직 충전할 곳만 생각하며 다닌다) 
  5% 미만 - 체념('그래, 나는 디지털 기기의 노예가 아니야'와 같은 정신 승리 시전)
마음의 안정도 전자 기기의 배터리만큼 닳아가곤 한다


앞서 예를 든 경험처럼 다행히 약속 상대를 만나 영화관에 들어간 경우라면 모를까, 출장 중이라든지 중요한 연락을 기다리는 상황이라면 위의 단계별 증상은 더욱 강렬하게 나타난다. 종종 카페나 식당 같은 데 있다 보면 주문을 하기도 전에 카운터에서 배터리 충전부터 묻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면 저리도 다급할까 싶을 때가 많다. 이 모습을 외국인이 본다면 한국에는 배터리 메뉴라도 있는 줄로 착각하지 않을까.(너무 나갔나)


아무튼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로 사람들이 더더욱 배터리 배터리 타령을 하게 된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가끔은 새삼스럽게도 이토록 다양한 기능을 구현하면서 꽤나 오래도록 기기가 작동되는 기술력에 감탄할 정도이니, 그 많은 편의를 누리고도 배터리 충전의 불편함만을 얘기하는 건 욕심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현대인들은 거의 뭐 예전으로 치자면 컴퓨터 한 대를 손에 들고 다니는 셈이 아니던가.




일각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배터리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기술이야말로 으뜸가는 노벨상 감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가만 짚어보면 또 이게 기술력만으로는 논할 수 없는 게, 길어야 2년 주기로 새 스마트폰을 팔기에 바쁜 제조사들 입장에서는 배터리가 적당한 시점에 노후화되는 게 수익의 측면에서 이득인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휴대폰 배터리의 기술은 당분간 현재와 비슷한 수준에서 조금씩 나아지는 정도가 아니겠는가 하고 짐작할 수 있는 이유다. 전기차, 수소차가 아무리 나와도 석유차가 금방 없어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듯이 말이다.(산유국들이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대다수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휴대폰 배터리 수치에 상당히 종속될 거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배터리 사용에 신경을 쓰고 방전 상태를 싫어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기에 보편화된 상품이 바로 보조배터리가 아닐까 한다. 자본주의 사회 아니랄까 봐 점차 그 용량과 가격을 올려가며 다양해진 보조배터리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가고, 심지어 일회용 배터리까지 (상대적으로)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충전이 급한 고객의 지갑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요즘이다. 





원래의 배터리를 위해 보조배터리를 따로 챙겨야 하는 걸 두고 편의의 증대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굳이 덧붙이자면 산업의 확장 내지는 시장의 발전이라고나 할까. 이러다가는 보조배터리의 보조배터리라는 식으로 보다 휴대하기 편한 방식의 충전기기가 쏟아져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이미 보조배터리를 큰 거 하나, 작은 거 하나 이런 식으로 몇 개씩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으니)


'우리, 휴대폰을 한 번 끄고 살아봐요' 따위의 말을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이렇게 쓰면서 생각해 보니 휴대폰에 신경을 끄고 마음 편히 영화를 감상했던 기억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내게 중요한 연락 올 데가 별로 없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배터리 '체념' 상태에서 영화에만 몰입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모처럼 편안했던 것이다.


가만, 이번에는 노트북 충전 케이블을 집에 꽂아두고 나오는 바람에 평소보다 조급한 마음으로 글을 쓴 듯하다. 노트북의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서 적잖이 초조한 상태로 타이핑을 했기 때문이다(졸고에 대한 변명치고는 좀 궁색해 보이렵니까). 휴대폰에 좌우됐던 마음 상태를 좀 다스리고 평화를 얻어볼까 했더니, 이번에는 노트북이라니. 그야말로 나는 배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나 보다. 모든 방전되는 것들에 무한한 충전이 가능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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