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의 남자와, 옛 동네 버스 기사님과, 회사 팀장님 모두 안녕하세요?
어느 출근길 아침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원치 않는 사람들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코앞에 딱 붙은 이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만원 지하철 안이었다. 서로 부대끼며 내리고 타는 이들 가운데 언짢은 표정이 5할이요, 그러거나 말거나 무표정한 얼굴이 또 5할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웃음을 띠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저 내 컨디션이나 잘 유지하면 성공적인 출근길일 터였다. 앞사람과의 밀착은 피하면서도 뒷사람과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보다는 몸의 긴장이 우선이었다.
드디어 내가 내릴 삼성역이었다. 많은 이들이 내리는 정거장인 덕분에 매우 쉽게 지옥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치 큰 파도에 올라탄 서퍼처럼, 커다란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균형을 유지하여 쭈욱 미끄러져 나왔다. 그때였다.
휘청일 정도로 내 몸이 흔들렸다. 제법 아프게 어깨 뒤쪽을 강타한 한 남자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서 나갔다. 그러면 그렇지, 러시아워의 2호선 역에서 서핑이 웬 말인가. 열차 내에서 잘 버텼다 싶었는데 막상 내려서 공간을 확보하자마자 그렇게 아프고 보니 불쾌한 마음이 솟았다. 내 기분이 괜찮아서 다행인 줄 알아라 너...라는 마음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봤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출근길에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몹시 바쁜 사람이거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인사말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여기다가 문득 잊고 있던 몇 년 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새로 생긴 버스를 처음 타던 어느 저녁이었다. 뉴타운의 입주민들이 꽤 늘어나자 신설된, 큰 단지 곳곳을 가로질러 도심으로 나가는 녹색 버스에 막 탑승하던 참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모든 승객에게 어김없이 건네는 기사님의 인사말이 상냥했다. 헤드 마이크를 통해 차내에 울려 퍼진 아저씨의 중저음 목소리에는 열정과 친절이 가득 담겨 있었다. 40대 중반쯤 되셨을까, 빳빳한 근무복까지도 매우 점잖던 기사님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인상적이었다.
인사뿐만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해당 버스를 종종 이용한 나는 그 기사님이 아침에 승객들에게 해 주시는 덕담까지 들을 수 있었다. '힘든 출근길이겠지만 웃음 잃지 말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라'는 그분의 말씀은 라디오 사연으로나 나올 법한 감동의 멘트였다.
좋았지만 불안했다. 승객들이 하차할 때도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말을 꼭 챙기는 기사님의 친절이 너무 수고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동네 버스라 해도 그 승객수가 만만치 않을 텐데, 매번 저렇게 인사를 하시다가는 목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기사님의 목소리는 갈라지기 시작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휴학 등으로 인해 다니는 시간대가 바뀌어서인지 좀처럼 뵙지 못하다가 친절한 그 기사님의 버스를 모처럼 타게 됐다. 오랜만에 운전석에 앉으신 그분을 뵙자니 버스 카드를 찍기에 앞서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그런데 기사님의 목소리는 가벼운 목례로 바뀌어 있었다. 인사말을 건네려던 난 잠시 주춤하다가 카드를 찍고 버스의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뒷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기사님의 중저음 목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잠깐 스쳤던 그분의 얼굴이 1년 전에 비해 많이 피곤해 보였던 건 나의 추측이 보태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정해 본다. 승객들의 승하차 때마다 일일이 인사를 건네던 기사님은 무척이나 의욕적이었다. 답례를 해주는 승객이 비록 절반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 그는 버스를 모는 일이 행복했고, 그 행복을 조금이라도 승객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다른 기사님들이 그런 그를 비웃는다. 얼마나 가나 보자고, 나도 처음에는 인사를 했지만 금방 그만두게 되었다고. 회사에서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승객들이 크게 고마워하는 것도 아닌데 몸만 축나는 일이라고.
그럼에도 친절한 기사님은 몇 달이고 인사를 지속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 상관없지 않나, 간혹 활짝 웃으며 답례를 해주는 승객들에게 힘을 얻어 그의 친절은 제법 오래도록 피곤을 이겨낸다.
하지만 얼마 후... 어떠한 계기에서든, 누적된 이유에서든 더 이상 기사님은 승객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기로 한다. 헤드 마이크도 내려놓는다. 그래야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역에서 나와 5분 남짓 걸었을까, 회사까지 가는 길에는 역 안에서 나를 치고 지나간 아저씨 보다도 발걸음을 바삐 옮기는 사람들이 무수했다.
다시 문득, 그의 무례함이 애초에 그랬을 리 없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버스 기사님의 친절이 시간이 흘러 변할 수밖에 없었듯, 그 남자의 무례함도 어떤 '무뎌짐'의 결과가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토록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그가 누군가의 어깨에 부딪힌 게 처음이었을 리 없다. 일찍이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심으로 사과를 했을지도. 그런데 자꾸 그러다 보니 그는 어쩐지 자신이 모자라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발등을 하이힐로 짓누르고도 아무런 사과가 없던 어느 여성을 겪으며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을 수도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역내에서 부딪히고 밟히는 건 그다지 사과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그는 누군가의 어깨를 치고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무딘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사말을 잃고 무뎌진 수많은 사람들. 원래 친절했는지 불친절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나 좀 지내봐야 알 일이라고 여기며 나는 회사 팀장님께 활기찬 인사를 올렸다. 돌아오는 인사라고는 그저 고개만 까딱. 아무 표정이나 말도 없었다. 그래, 저 팀장님도 원래부터 저러지는 않으셨으리라 여기며 내 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