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참 대단하다 싶어서 마불나불 블라블라 (영화 스포X)
* 영화 내용에 대한 언급이나 스포는 일절 없습니다.
마블 영화의 인트로 영상이다. 다양하고 컬러풀한 이미지가 만화책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넘어간다. 10여 년 간 다양한 작품들의 등장과 함께 조금씩 바뀌어 왔으나 그 기본 틀이 워낙 견고해 누가 봐도 마블 영화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의 원작 팬들 뿐만 아니라 히어로물에 별로 관심이 없던 수많은 여성 관객까지 사로잡은 마블의 영화들, 일명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이렇게 인트로부터 남다르다.
마블의 19번째 영화이자 10주년을 맞아 엊그제 개봉한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가 벌써 2백만 관객을 넘었다는 소식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들 뿐만 아니라 언론을 장악하다시피 한 이 영화로 온라인 공간은 온통 떠들썩하다. 예전에는 다양성의 말살이라느니 미국식 히어로물과 자본의 침공이라느니 하는 비판적인 얘기들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으나, 어느새 그런 여론은 거의 자취를 감춘 듯 보인다. 그만큼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블 영화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마블 영화의 팬이다. 한 편 두 편 보기 시작한 게 어느새 지금껏 나온 19편 전부를 한 번 이상씩은 보았고 유튜브 영상 등을 통해 마블 작품들에 대한 이해도가 꽤나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굳이 마블 팬임을 자처하지는 않았다. 주위에서 너도나도 마블에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다소 삐뚜름한 성격상 나까지 거기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혹시 누군가가 히어로 영화 중 어떤 것을 좋아하냐고 딱 집어 묻거든 나의 대답은 주저 없이 '다크 나이트'였다. 실제로 그러할뿐더러, 굳이 비교하자면 아이언맨의 오락성과 기계성 보다는 배트맨의 철학성과 인간성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는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의 대답과 비슷하다. 실은 멜론 인기 차트를 듣고 있으면서도 막상 대답은 존 레전드를 좋아한다거나 요새 비틀즈 노래를 다시 듣는다는 식으로 답하는 심리라고나 할까. 어느 쪽이든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 그냥 대중음악 이것저것 듣는 사람이구나'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멜론 차트를 듣는다는 식보다는 특정 가수를 언급하며 대략적인 취향이라도 내세우는 게 보다 성실한 대답 같지 아니한가. 대개의 질문과 대답에는 이처럼 질문자의 궁금증보다는 답변자의 자기만족이 중요한 경우가 많은 법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언맨을, 토르를, 어벤져스 영화를 다 보면서도 정작 마블 얘기는 잘 안 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저것 안 따지고 마블 영화가 나오면 무조건 보고 감탄하게 된 건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에 빠져들면서, 그와 동시에 '신적인' 존재임에도 인간 세계에서 유머러스함을 뽐내는 토르 시리즈를 챙겨보면서부터다. 이 밖에도 다양한 영웅들이 인간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모습으로 하나둘 등장해 온 마블 영화는 일단 보고 나면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나를 만족시켜줬다. 아무렴, 마블 영화들의 설정이 다소 과장됐다 한들 DC에서 슈퍼맨과 배트맨을 함께 등장시키며 보여준 무리수에 비하면 차라리 현실적이라고까지 여겨져 왔다. "Mar....Martha?" 가 다 웬말이던가.(정신을 잃은 슈퍼맨이 배트맨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어머니 이름이기도 한 동명의 '마사'라는 말을 듣고 각성했던 그 서글펐던 장면)
영화 내의 개연성이라든지 히어로 각각의 인기 같은 건 차치하더라도, 10여 년 간 마블이 세워 온 세계관은 뒤늦게 본격적인 영화화에 뛰어든 경쟁 만화사인 DC코믹스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뭐, 미국 만화에 워낙 조예가 깊은 사람들 중에는 그럼에도 DC의 매력을 선호하는 이들도 더러는 있다만 적어도 영화에 한해서는 마블이 독보적인 흥행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10년이라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타노스'라는 절대 빌런과 '인피니티 스톤'이라는 가상의 우주 물질을 등장시켜 영화 팬들을 오래도록 설레게 한 마블의 이번 영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는 그래서 더욱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시나리오면 시나리오, 연출이면 연출, 홍보면 홍보 모두에 있어 흠잡을 데 없는 치밀함으로 세계 영화 시장을 들썩이게 만든 마블 스튜디오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개봉 첫날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를 감상할 수 있던 게 소확행이라면 소확행이었던 이유를 이처럼 장황하게 풀어놓고 보니 이 정도면 나도 상당한 덕력이 쌓인 건 분명한 것 같다. 그동안 몇 차례 함께 히어로 영화를 보다가 졸던 여자친구조차도 이번 영화는 굉장히 몰입해서 봤고 영화관을 나오면서는 제일 재밌다고 했다. 이를 보면 마블이 야심차게 준비한 이번 영화는 최소한 자신들이 기대한 만큼의 흥행을 충분히 누리고도 남을 것으로 보인다.
디즈니사의 엄청난 자본(2009년 디즈니가 마블 엔터테인먼트 인수)과 헐리웃의 제작 환경, 유명 배우들이 마블 영화 흥행의 주요한 요소임은 맞다. 하지만 이것이 곧 전 세계적인 흥행을 담보하는 요소가 아님은 비슷한 자산을 보유하고도 팬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은 수많은 영화들이 증명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MCU가 지닌 영향력의 근간이 결국 '이야기의 힘'에 있지 않나라고 생각해 본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창조자이자 아버지라고까지 불리는 '케빈 파이기'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94068)의 길고 긴 내용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그가 MCU를 기획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원칙이자 태도이다. 이는 바로 '원작 만화의 열혈 팬을 기쁘게 하자'라는 모토인데, 여기서 내가 주목한 마블 영화의 진정한 힘은 바로 스토리, 즉 이야기에 있다. 공상 만화의 골수팬들이 영화에 기대하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탄탄한 스토리에서 얻는 재미야말로 가장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는 포인트라는 생각이다. 이는 엄청난 캐릭터들에 화려한 CG를 입히고도 시리즈가 이어질수록 '산으로 향한' 스토리 때문에 인기를 잃은 '트랜스포머' 영화를 생각해 보면 금세 이해가 된다.
원작인 코믹스의 내용을 다룬 각종 포스팅들을 아무리 봐도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마블 세계관은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좋아하는 팬들을 기준으로 삼는 일이야말로 만화를 영화화하는 데 있어 당연한 대원칙 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영화 시장에서는 종종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기 일쑤인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 매니아 층이 아닌 보다 많은 대중을 타겟으로 삼아 상업적 흥행을 거둬야 하는 영화 관계자들로서는 긴 안목보다는 당장의 수익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이른바 '큰 그림'을 그려 놓고 차근차근 개별 히어로들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고, 마침내 여러 히어로들을 한 작품(어벤져스)에 넣어 시리즈화하는 데까지 성공한 MCU의 확장이야말로 스토리의 튼튼한 뼈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하다. 수십 년 간 다양하게 발행된 원작 만화들과 여기에 등장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제작 시점에 맞게 각색하고 조합한 마블 영화들이 가진 힘이야말로 '스토리의 연결성'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케빈 파이기는 원작 만화가 지닌 흥행 요소들 중 영화로 만들었을 때에도 충분한 인기를 얻을만한 스토리를 하나하나 증명해 왔고, 이러한 10여 년의 대장정이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쨌든 마블 시리즈는 '외국 영화'이다 보니 감상을 통한 재미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당면한 국내의 현실과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는 게 사실이다. 어릴 땐 그래도 반강제적으로 애국심을 독려하던 사회 분위기로 말미암아 우뢰매니 홍길동 시리즈니 하는 국내 공상 만화/영화를 접하고 감탄했는데, 요새 아이들은 어떠할지 한 번 생각해 봤다. 만화 시장이야 진작에 일본에 자리를 내줬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영화 작품들 중에서 헐리웃 대작에 시쳇말로 '비빌만한' 작품이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나지를 않는다. 자본력의 차이가 워낙 큰 탓에 SF 장르 같은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 밖의 국내 영화들 중에서 10년이 아니라 5년이라도 꾸준히 인기를 얻어 시리즈로 이어진 이야기는 도저히 찾기 힘들다.
이는 문화 자본이 국경을 간단히 뛰어넘는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많은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인 현실이겠으나, 인구 5천만 중 천만 이상이 한 작품에 열광하며 수많은 '골수팬'이 넘치는 한국의 상황이 조금 더 특수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야기'를 참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민족이라는 건 역사적으로도 입증된 바인데, 마블 영화들의 국내 흥행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평론가도, 기자도 아닌데 어설프게 국내의 현실을 끌어올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단지 내가 마블 영화를 보고 난 뒤면 으레 떠올리곤 하는 단상이 위와 같음을 솔직하게 드러낼 뿐이다. 가뜩이나 영화 관람료가 계속 오르는데 그 돈이 내 주위의 국내 영화인들에게 가는 게 아니라 돈 많은 미국 시장에 펑펑 유출될 생각을 하니 어쩐지 더 아까운 마음이 든단 말이다.
아무튼 그 많던 우리의 설화와 전설들에도 불구하고 아동 필독서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압도적으로 많은 서점가의 현실과, 온통 어벤져스 홍보물로 도배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에 환호하는 영화관들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를 두고 그저 서구의 산업화, 상업화 선점에 의한 후발 주자들의 한계로 보기에는 우리의 컨텐츠들이 여러모로 떳떳해 보이지 않는 건 나만의 자조일까.
솔직히 나이가 들며 여러 가지 이유에서 어릴 때의 순수했던 애국심 같은 건 많이 사라졌다 . 그래서인지 컨텐츠 시장의 압도적인 규모와 수준 차이 앞에 살아생전 우리에게도 해리 포터와 같은 소설이, 마블 시리즈와 같은 영화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등장한 <블랙 팬서>의 흑인 영웅을 통해 추측해 본다면, 몇 년 안에 드디어 라틴계라든지 아시아인 히어로 한 명쯤 주연인 영화가 마블에서 나올지도 모를 거라고 조심스레 예측해 볼 뿐이다.
세계화 시대니까. MCU는 세계를 아우르는, 아니 이를 뛰어넘어 전 우주적인 스토리를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으니까 최고의 오락거리로 즐기기나 해야겠다. 그래도 영화를 보면 꼭 외계인들은 뉴욕을 먼저 침공하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돈 많은 그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마무리하며,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는 확실히 재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