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6. 할머니의 상자로 배운 사업에 무게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렸다. 아침 일찍 걸려 오는 전화는 좋은 일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아버지의 말을 실감하던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안녕하세요.ㅇㅇ 영업소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죄송한데요... " 뭔가 난처한 말투다.
"오늘 아침 영업소에서 배송 나간 차량이 전복되어 급하게 연락드렸습니다. 도착 물량을 배송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추후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뚜뚜뚜...
다급한 현장 상황을 직감했다. 더 이상 뭐라고 더 질문할 수가 없었다. 집하 고객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미리 대처하라는 통보였다. 카톡이나 메신저가 없던 시절이라 모든 업무는 모두 전화로 소통했다. 하루 종일 배송문의 전화로 불이 날 지경이었다. 고객에게 자초지종을 말해본들 변명으로 들릴 뿐, 대책이 없으니 답답한 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날은 개인 배송도 문제지만 업체 배송이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 중요한 자재가 배송이 안 되면 앞으로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객은 수화기가 터질 듯이 호통을 쳤다. 뇌의 회로 중에 분노 조절 장치에 고장이 나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지금 당장 사무실로 찾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협박까지 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말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씩씩대는 얼굴로,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대기업 운송업체라는 사무실 이름을 걸고 사업을 하면서 제시간에 제품을 배송한다는 약속도 못 지키면 어떡할 거냐고 따져 물었다.
급한 일을 못 하게 된 고객의 답답한 마음은 백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연신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에서 가슴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입 밖으로 바로 터져 나오는 말들을 만삭인 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한참을 지나서야 현실을 직시했는지, 분노 조절 장치에 스위치가 켜졌는지, 다른 연락이 오면 전화해 주라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사업을 하다 보면 날씨의 영향도 자연재해로 인한 지연도 모두 사장 책임이다. 배송 지역 문제로 인해 사고가 생기면 과실책임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오롯이 집하 현장에서 받는다. 역지사지로 반대의 경우가 되는 날이면 손해배상까지 책임져야 하므로 더 복잡해진다.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는 가을이 되면 모든 직원이 두 배로 힘들다. 일이 많기도 하지만 배송물량이 두 배로 무거워진다. 지금은 업계에서 집하 무게 제한을 두는 규정이 정해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대충 가늠해서 통용되던 때였으니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쁘게 일을 하다 보면 대형 사고는 늘 가까운 곳에서 터진다. 농사가 끝나고 나면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게 쌀과 일 년 내내 수확한 농작물을 보낸다. 어찌 보면 우리네 어른들은 이런 소소한 재미로 일 년 내내 땀 흘리며 농사를 지으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식들이 행여나 객지에서 굶을세라 곱게 키운 작물을 알뜰살뜰하게 쟁여 넣으신다. 하루 작업시간이 끝나갈 때쯤, 할머니 한 분이 작은 수레에 종이 상자 하나를 싣고 오셨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
"서울 사는 딸에게 보내는 건디 별거 없어..."
'이 상자 안에 뭐가 들었어요?'
"여기 안에 콩하고 볶은 깨 하고 고춧가루랑 이것저것 좀 넣었어."
'혹시 물 흐를 만한 거는 없나요?'
"아이고 걱정 없어... 그런 거 하나도 없어... 오늘 보내면 내일은 도착하는 거지?"
'네~~ 지금 출발하면 내일 따님에게 도착할 거예요.'
"거기가 어디라고 이게 낼 도착한다니 세상 참 좋아졌네..."
세상 좋아진 현실에 만족해하시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과 함께 할머니의 정성이 담긴 종이 상자를 가장 높은 곳에 실렸다. 추수가 끝난 시골이라 가을에는 윗지방으로 올라가는 물량이 넘친다. 쌀을 가득 싣고 떠날 준비를 마친 차량 위에 할머니의 상자를 올렸다. 만선의 기쁨을 알기라도 하는 듯 날개가 있는 윙바디 트럭은 전국적으로 물량이 모이는 터미널로 힘차게 달렸다. 집하 터미널에 새벽에 도착하면 밤샘 작업을 마치고 담날 아침부터 기다리는 주인을 찾아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