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7. 그 길을 걷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아침 업무는 어두운 새벽을 가르며 도착한 물량을 하자 하는 작업부터가 시작이다. 이른 시간부터 사무실 안에서 바쁜 하루를 알리는 전화 소리가 요란하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ㅇㅇ 영업소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소장님 계십니까?"
받자마자 책임자를 찾는다.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은 늘 어긋나지 않는다.
어제저녁 윙바디 트럭에 실린 쌀이 모두 간장에 젖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간장을 실은 적이 없는데 그럴 리가 없다.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우리 차량이 맞는지 다시 한번만 확인해 달라고 했다. 분명히 적재하는데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말이 맞다면 큰 생각 없이 올린 물건이 있을 것이다. 믿었던 말에 발등을 찍히는 일 하루 이틀이었겠는가마는 이 모든 일은 더 꼼꼼하게 챙기지 못한 우리 쪽 책임이다.
문득 어젯밤 늦게 찾아온 할머니가 생각났다. 주소 확인을 해보니 그 할머니 상자 안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맞다. 사고 조사를 하기 위해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 어제 보낸 택배 상자 안에 뭐를 넣으신 거예요?'
"딸이 혼자 김장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보냈는데, 여태껏 딸이 받았다는 전화가 안 오든디...."
할머니께서 보낸 상자에서 간장이 흘러서 트럭 안에 물품들을 배상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다. 어제 분명히 물어봤는데 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할머니께서는 간장이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정확하게 고지를 안 한 것이다. 고지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엄연히 고객 과실이다. 이 부분에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할머니께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귀하게 보낸 건데 딸에게 전달 못 한 것만 탓하며 아쉬워할 뿐이었다.
그 당시 사고 금액은 한 달 매출을 훌쩍 넘는 금액이었다. 현금흐름이 원활하지 않던 터라 사업에 위기를 느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점점 더 버티기 힘들어만 갔다. 사고 난 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막막했다. 다시 되돌려 받는 것도 막대한 돈이 들어갔다. 이성적으로 판단이 흐려지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지금 같았으면 다르게 해결했을 테지만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 현명한 판단을 못 하게 된다.
사업이 커지고 일이 많아질수록 크고 작은 사고는 늘 따라다닌다. 시간에 쫓기고 빠르게 움직이다 보면 자칫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어느 날은 일하는 직원이 후진하는 차량에 이웃집 아이를 다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여러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는 곳이어서 이웃 건물에 놀러 온 자녀였다. 병원 진료 후 크게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을 계기로 사무실을 옮겨야 했다. 지금도 뉴스에서 비슷한 소식을 접하게 되면 남 일 같지 않게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콩닥거린다.
하루하루 넘쳐나는 작업량은 밤낮없이 일을 해도 줄어들지 않았다. 내일도 이만큼 아니, 더 많은 물량이 쌓일 텐데 하는 생각에 하나라도 더 처리하는 게 목표였다. 나날이 배는 불러오고 만삭이 되어가는 몸에 잠이 쏟아졌다. 피곤이 쌓이다 보니 사무실 소파에서 깜박 졸다가 소파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때는 맛동산이 그리 먹고 싶었다. 오독오독 씹어먹는 식감이 그리 좋았다. 하지만 달콤한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맛동산을 먹는데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입안에 있는 맛동산을 뱉었다. 어금니가 부러진 것이다. 맛동산을 먹다가 어금니가 부러지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만삭이 되어 가는 몸을 돌보지 못한 결과다.
어느 날 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살굿빛 불빛이 너무 예뻐 보였다. 거실에는 티브이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의 모습과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의 실루엣이 보였다. 저녁이 있는 삶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파트 불빛이 부러워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저녁이 있는 삶, 아침 햇살에 행복해하고 저녁노을에 감사하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삶. 경제적 자유를 넘어 시간적 자유를 가진 삶이 진짜 부자다. 일에 지쳐 내 시간이 없는 삶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사업을 시작하고 최고 매출을 찍고 있었지만 내 몸과 마음을 바쳐 돈과 바꾸는 듯한 직업은 이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 길을 걷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어디 이런 일뿐이겠냐마는 사업을 그만두려고 하는 시기에 본사와의 갈등은 체인점 사업에 대한 노하우까지 배우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선택한 길에 후회는 없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세상을 알아서 다행이다. 경험하는 모든 것들 앞에 헛된 수고 헛된 시간은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그 당시 처절하게 실패 했어도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자산이 되어 앞날에 빛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