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인의 일상

발톱이 자라나듯 기억은 돋아나지만

by 크리스티나

보리가 익어가는 오월입니다. 논에는 모내기를 하느라 물이 예쁘게 찰랑거리고 말입니다. 생전에 부모님께서는 이 시기에 항상 농사 준비로 바쁘셨지요.

살면서 과거를 떠올리고 싶은 순간은 없었어요. 그저, 흘러간 시간은 세월에 맡겨두고 저는 제 갈 길만 열심히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요. 스스로 돌아보지 않으려 고집하니, 삶이 저를 돌아보도록 만들더군요.


오빠 두 분과 조부모님을 떠나보내고서도 저는 울지 않았거든요. 그저 살았어요. 마치 아무일 없다는 듯이 학교가고 직장 다니고. 그것도 지독하게도 성실히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막내오빠까지 사고로 잃게 되자 저는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겉보기에는 다를 바 없이 때가 되면 밥 먹었고 일했고 사람 만났고. 그런데 이건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평상심을 찾으려고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심리상담도 받아보았지만, 무너진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어요. 그 시기부터 내키지 않았지만, 지나간 시간들을 성찰하기 시작했죠.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를!


경험이라는 것이 치열하게 사유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읽어내지 못하면, 사람은 같은 패턴의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리고 실수가 되풀이되면 더 이상 실수라고 볼 수도 없게 되구요. 저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넘어졌거든요. 비슷한 유형의 사람과 상처를 주고받았고, 탈피하고 싶으면서도 같은 무늬의 인생을 반복했고 말입니다.


청보리가 찬 바람에 일렁거리던 봄이 어제인 듯한데 벌써 수확을 앞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간은 쉼없이 흐르는구나, 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나날이 빛깔이 변해가고 통통해지는 보리를 생각없이 보고 있으면 묻어둔 기억들이, 잘라낸 발톱처럼 돋아납니다.

장날에 어머니를 따라 장터에 가서 번데기를 처음 먹었던 일, 보리싹이 올라올 무렵 보리밟기했던 기억, 야심한 시각에 책을 본다고 야단맞았던 일들... . 냉정히 생각해보면 인생의 순간들이 좋은 일들로만, 혹은 싫은 사건들로만 채워지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왜 그 시절의 저는 사람이, 세상이, 심지어 자신마저도 싫기만 했을까요? 저의 그림자에서도 도망치고만 싶었거든요.


아이를 목욕시키다보면 목욕물이 더러워지잖아요. 그렇다고 아이까지 버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려웠고 힘겨웠던 그 시절 속에도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우리 자신이 있었고, 사랑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말예요. '참, 좋았던 시절'이라는 식으로 미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억지로 읽어야 했던 책 속에도 일부분 마음을 머물게 하는 문장들을 만나게 되는 법이니까요.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하고 또 희망하게 만들구요.


자연이, 오고갔던 모든 인연들이, 사실은 매순간 저를 성장시키는 책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자라나는 기억들을 그리 고통스럽지 않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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