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오스만 세밀화 속 죽음과 사랑

by Clare books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 나흘째다..
나는 행복했다. 아니, 지금에서야 내가 행복했던 줄을 알겠다..
산산이 부서진 머리통과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잠긴 채 상처투성이로 썩어가는 몸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육체를 떠나려 몸부림치는 영혼의 깊은 고통은 또렷이 느낄 수 있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강렬하다.
죽은 몸이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개가 말하고, 얼굴 없는 살인자가 말한다. 세밀화 그림 속 빨강도 말한다. 살인사건 주변의 인물들이 한 명씩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의 사연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이 연극을 보는 듯 느껴진다.

죽은 이와 살인자는 모두 이스탄불의 세밀화가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여인 세큐레를 위해 살인자를 밝혀내고, 사라진 술탄의 밀서 속 그림을 찾아내야 한다. 작가는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아서, 우리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고 곧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소설 속 ‘오스만 세밀화’(miniature)는 책의 삽화 형태로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회화이며, 16세기 이스탄불에서 꽃 피운 예술이다.

이 소설은 주어진 단 이틀 동안 살인자를 찾아내야 하는 추리소설인 동시에, 아름다운 세큐레를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카라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이다. 작가는 이슬람 예술의 꽃인 오스만 세밀화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술탄의 귀한 국고 문까지 활짝 열어 금박을 입힌 경이로운 그림들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막상 이 책에는 세밀화 삽화가 하나도 없다. 책에 언급된 그림들과 책표지 그림의 원본들을 찾아보았더니, 화려한 색감으로 왕이나 역사 속 인물의 이야기의 한 장면인 듯하다. 인물들과 구도는 평면적인데, 매우 세밀하게 표정과 배경 건물의 장식, 나무의 꽃잎 나뭇잎 하나까지 표현되어 있다. 좀 더 확대해 자세히 보고 싶은데 안 되는 걸 보니 크기가 작은 그림들이겠고, 실물을 돋보기로 보아야 할 듯하다.

소설 속 세밀화가들은 어릴 때부터 화원에서 도제식으로 그림을 배워 이러한 작은 그림에 평생을 바친다. 사실 훌륭한 스승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도록 훈련을 받으며, 그림에 자신의 이니셜조차 남길 수 없다.
이들은 말을 그릴 때 결코 실제 말을 보고 그리지 않는다. 신이 보는 완벽한 말, 이데아적 형상의 말을 그린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는 실제 말보다 더욱 살아있는 듯하고, 이들은 눈을 감고도 말 그림을 그리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종국에는 눈이 멀어 장님이 되는데.. 그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긴다.

신이 보는 세상, 술탄의 명령에 따라 백성을 교화하는 똑같은 그림을 평생 그리던 이 세밀화가들이, 어느 날 유럽인과 베네치아 인들의 자유로운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에 우리는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서양인들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눈이 보는 것처럼 그렸고,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의 중심에 신이 아닌 사람이 있었고, 그 그림들은 보는 이를 매료시켰다..

예술에 있어 의미의 세계가 끝나가고, 형식의 세계, 인간을 위한 예술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 오르한 파묵은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튀르키에 이스탄불 출신이다. 그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 소설이 인생과 예술, 사랑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함께, 서양 문화의 강한 영향으로 동양 전통 예술과 감성이 사라지고 있음에 대한 깊은 슬픔을 담고 있다고 말하며, 한국 독자들은 이러한 슬픔을 깊이 이해할 것이라고 썼다.

책 속에서
-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또는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비흐자드 <유수프의 유혹>, 1488년, 30x22, 카이로 국립도서관
<후마이와 후마이윤>, 1430년, 파리장식미술관, 페르시아 왕자 후마이가 중국 공주 후마이윤을 만나는 장면.
<목욕 중인 쉬린과 마주친 휘스레브>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이난아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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