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890” 오스카 와일드. 임슬애 옮김. 민음사 쏜살문고.
“정말 슬픈 일이에요! 나는 나이 들어 끔찍하고 추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이 초상화는 영원히 젊음을 잃지 않겠지요. 이 6월의 어느 날에서 단 하루도 더 늙지 않을 거에요.. 서로 반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영원히 젊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 대신 초상화가 나이 들어 끔찍해진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뭐든 바칠 거에요! 그래, 뭐든 바치지 못할 게 없어요!
그의 천성이 서서히 꽃처럼 피어나더니 기어이 타오르는 듯한 주홍빛 꽃송이로 여물었다. 영혼이 숨어 있는 은신처에서 기어 나오자 욕망이 그것을 마중하러 나섰다..
바로 이곳에 한 인간이 자기 영혼에 가져온 파멸을 보여 줄 영원한 증거가 있었다.. 영원한 젊음, 무한한 열정, 미묘하고 은밀한 쾌락, 거친 즐거움과 더 거친 죄악, 그는 이 모두를 누리리라. 그의 수치심은 초상화가 짊어질 테고, 그것이 전부였다..”
책 표지를 가득 채운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의 초상화에 계속 눈길이 간다. 스무살 청년 도리언 그레이가 꼭 이렇게 매력적인 얼굴이었겠다는 느낌이다. 초상화가 정중원이 이 소설을 위해 그린 작품이다.
소설에는 세 남자가 등장한다.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 그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를 모델로 삼은 화가 바질 홀워드, 그리고 악마같은 말솜씨의 귀족 해리 헨리 경이다.
이 소설이 1890년 당시 영국 사회에 치명적인 스캔들을 불러 일으킨 이유는, 법으로 금지된 동성애를 암시하였고 또한 작가가 실제로 남성 애인 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이 소설을 읽는데 불편함을 주지는 않는다.
이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그보다 더 깊은 인간의 본성과 영혼을 다룬다. 작가는 인간 내면의 욕망을 까발려 드러내고, 아름답고 순진한 얼굴에 가려진 도리언의 영혼이 한 걸음씩 타락해가는 과정을 우리가 숨죽이며 지켜보도록 한다. 헨리 경의 교묘한 언변은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데, 그 시작은 이렇게 평범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인생의 목적은 자신을 발달시키는 겁니다. 천성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 그게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지요.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두려워해요. 모든 의무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잊어버렸죠..
인간이 자기 인생을 완전히, 완벽히 살아 낼 수 있다면, 모든 감정에 형태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모든 생각을 표현해 낼 수 있다면, 모든 꿈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참으로 신선한 기쁨의 충동을 얻을 테고, 우리는 중세 시대에서 비롯한 모든 병폐를 잊어버린 채 헬레니즘이 추구하는 이상향으로, 어쩌면 그보다 더 훌륭하고 풍요로운 것으로 회귀할 수 있겠지요.”
선한 삶과 악한 삶, 선한 영혼과 악한 영혼, 그 차이는 어쩌면 단지 그 눈이 바라보는 방향의 차이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헨리 경의 이 말을 시작으로, 도리언은 갑자기 눈을 돌려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 아름다움과 젊음을 깨달아 영원히 소유하기를 욕망했고, 그럴 수만 있다면.. 영혼까지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되었다. 그 이후 도리언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살아간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악한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본다.. 첫 희생자인 삼류 극장 여배우 시빌은 가련하다. 진흙탕 속 청초한 예술혼으로 도리언을 매료시켜 한 순간에 그의 숭배와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가, 도리언의 변심으로 바로 다음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의 매몰찬 눈빛, 잔인한 말은 그녀의 삶 전부를 갈기갈기 잔혹하게 찢었고, 그날 밤 그녀는 죽었다. 그러나 그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고, 마땅한 애도조차 없이 그녀를 잊는다.
더욱 악해지는 도리언의 영혼이, 굳게 잠가놓은 다락방 보라색 커튼 속 초상화로 우리에게 보여진다. 밤마다 초상화 속 추악하고 늙은 영혼과 자신의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비교하며 쾌감을 느끼는 모습은 참으로 괴기스럽다.
인간에게 선과 악을 분별할 능력이 있어, 애써 선을 행할 의지가 약하기는 하나 반대로 악을 행하면 양심이 고통스러움을 느껴 다시 돌이킬 수 있는 존재임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도리언은 양심에 이미 귀를 막았고, 차츰 더 악해져 살인을 서슴치 않는 존재가 된다. 양심의 소리마저도 죽여 없애버리고자 한 도리언이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