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장편소설. 창비.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 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 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 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장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보육원 책자에 몇 줄로 남은 할머니의 회상은 이렇게 다른 증언들로 사실의 두께를 얻어갔다. 수리를 통해 보강되어 가는 대온실처럼.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팍팍하게 살아가는 삼십대 중반 여성 영두, 글솜씨로 학생시절 ‘석모도 헤밍웨이’로 불렸다는 그녀의 현재의 삶은 차비 빼면 백만원 남짓 손에 쥐는 임시 일자리에도 감사해야 하는 처지이다. 창경궁, 원서동이라는 단어에 망각 속 몸서리쳐지는 기억이 있음에도.. 그녀 옆에는 중학생 딸 산이를 홀로 키우는 오랜 친구 은혜가 가족처럼 함께 한다.
그녀는 창경궁 대온실 복원 수리를 맡은 설계사무소 직원들 옆에서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한다. 창경궁 안에 일본인들에 의해 동물원이 조성되고 대온실이 건립되던 1908년 당시의 역사 기록을 통해 그녀는 백여 년 전 주요 인물들과 그 자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동시에 그녀는 살기 위해 망각했던 창경궁 담장 옆 원서동 낙원하숙에서의 이십 년 전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하숙집 안문자 할머니의 허드렛일을 돕는 조건으로 서울로 유학온 열다섯 살 중학생 영두가 있었다.
김금희 작가는 꽃잎을 한 장씩 떼어내듯 영두의 과거 기억을 한 겹 씩 조심스럽게 걷어내 우리에게 드러낸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석모도 바다와 푸른 하늘을 마음에 품고 오히려 서울 사람들의 불행한 표정을 안타깝게 여겼던 그녀, 남을 쉽게 믿고 웃음이 헤프고 인생을 낙관했던 그녀의 삶은 악의로 가득찬 두 친구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가 살기 위해 그 장소에서 뛰쳐나와야만 했던 장면, 그리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십대를 어두운 터널에 갇혀 홀로 보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녀의 억울함과 분함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너 억울하지 않니? 라고 물어봐 주었던 오직 한 사람, 피도 섞이지 않았던 안문자 할머니의 사랑. 그러나 그것만으로 치유되어 일어서기에는 그녀는 어렸고 상처는 너무나 깊었다.
그녀와 친구 리사, 안문자 할머니의 이십년전 이야기..
그리고 대온실 관련 주요 일본인들과 그 아이들, 이어지는 일본의 패전과 대한민국 독립, 625 전쟁의 매우 오래된 이야기..
분명히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낙원하숙을 통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아 하는 감동과 탄식에 젖는다.
대온실 도면에는 없는데 탐지된 지하 구조물, 그것을 발굴하여 대온실의 완전한 수리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쓸모없고 아무도 모르니 그냥 덮고 빨리 끝내자는 주장..
살기 위해 망각하는 것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지만 그것에 직면하여 마침내 아문 상처를 확인하고 자유로워지는 것..
백 년 넘은 건축물이 지나온 시간과
삼십대 영두, 살아계셨다면 팔십대 안문자 할머니가 지나온 시간이 소설 속에서 하나로 겹쳐진다.
영두는 어쩌면 할머니의 아픈 삶 전체를 유일하게 이해한 한 사람이었음에 이 이야기는 더욱 아름답다. 그녀는 어머니를 평생 잊지 못하고 긴 세월 홀로 일본인으로 살아간 할머니의 잊혀질 뻔했던 소망이 이루어지게 도움으로써, 그 사랑을 할머니에게 다시 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