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마음이 자주 메말라 간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메마르다’는 말 외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저 하루를 살아낸다는 기분이 든다.
내 열심으로 버티는 하루.
주일이면 어김없이 예배 자리에 앉지만, 문득 ‘오늘은 쉬고 싶다’는 속삭임이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나를 탓하지 않으신다는 걸 안다.
그분은 쩨쩨하게 우리의 피곤함을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기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내 마음을 조용히 위로하셨다.
다시 한 주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바로잡아주셨다.
그러던 중, 문득 오래전 읽었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탕자의 이야기를 ‘작은 아들의 방황’으로만 이해했었다.
그런데 책 속 한 단어가 유난히 마음을 붙잡았다.
‘탕부(Prodigal)’ — 흥청망청, 낭비하다.
책은 말한다. 진짜 탕자는 작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은 사랑을 아낌없이, 때론 흥청망청 쏟아부으시는 분.
누가복음 15장에서 집 나간 아들을 향해 달려가 포옹하신 그분이 바로 그런 아버지이다.
책을 읽다 문득 멈춰 섰다.
나는 작은 아들보다 오히려 큰 아들을 더 닮은 건 아닐까.
집을 떠난 적은 없다.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고, 맡겨진 사역도 성실히 감당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엔 늘 빈틈이 있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스스로의 평가 속에서,
나는 여전히 보상받기 위한 신앙, 자격을 증명하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마주한 문장 하나가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큰 아들은 아버지 집 안에 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았다.”
그 문장을 읽고 오래도록 멍하니 있었다.
겉으로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지만, 진심으로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다는, 내가 한 일의 무게를 따지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탕부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조용히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심지어 우리의 완고함과 실패 속에서도 먼저 달려오시는 분이라고.
책을 덮고 난 뒤,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신앙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보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믿는 데서 시작된다는 사실.
그 사랑을 믿을 때 억지로 애쓸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억누르지 않아도 자연스레 흘러넘치니까.
요즘은 기도할 때
“하나님, 도와주세요”보다는
“하나님, 저 돌아왔어요”라는 고백이 먼저 나온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자녀가 된다.
종이 아니라, 일꾼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
복음은 결국 그 이야기다.
돌아오라고, 괜찮다고.
하나님이 먼저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이야기.
혹시 지금도 신앙의 집 안에 머물고는 있지만
마음은 멀어져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주저 말고 돌아가도 괜찮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해 먼저 달려오시는 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