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소설) 바람의 이정표

by 소안


섬 허리 풀밭에 앉아 멀리 물마루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섬에 온 뒤 종종 올라와 눈의 피로도 풀고 하염없이 멍 때리곤 하는 장소인데, 시선 아래엔 이름 모를 들풀과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예쁜 야생화들이 지천에 피어있다. 시선과 수평을 이루는 멀지 않은 곳엔 갈매기들이 우아한 선회를 통해 자꾸 내 눈에서 사라지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먹이를 찾는 것 같기도, 혹은 방파제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여인들의 수다를 엿들으려 하는 듯도 하다.

여행객인 듯 한 여인들 옆 포구에는 고깃배들이 오라를 받고 하염없었다. 고기잡이를 포기한 게 오래됐는지 온통 낡아 배 그 본연의 목적은 없고 의무만 남아 관절염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나의 글감에 도움을 주려는 것 같기도 해서 내심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한참보다 더 한참 동안 말끄러미 포구에 널브러진 평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갈매기의 비행과 여인네들의 웃음과 서녘에 걸린 잔광이 비척거린다. 그즈음 커피 생각이 슬쩍 솟아 항 포구 2층 조그만 카페 문을 밀었다. 카페는 낙도에 비교해 봤을 때 내 눈엔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다소 썰렁하긴 했지만 인쇄된 모네의 수련이 바다가 보이는 창쪽에 걸린 거 하며 적당한 데시벨로 지고이네르바이즌이 귓속을 파고드는 거 하며 게다가 새무룩하긴 해도 하늘이 통으로 보이는 창은 섬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카운터 쪽에서 이울어가고 있는 화병의 꽃을 보다 주인의 얼굴에 시선이 가는 순간, 한번 더 내가 지금 머무는 곳이 섬인가? 하는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주인 여자의 외모에서 드러나는 현학적이고 고졸한 모습이 그런 생각의 발원지가 되었을 터였다.

단지 키오스크가 없다는 게 그나마 도시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하고 모네의 수련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파제의 여인들이 섬을 떠나려고 하는지 돗자리를 걷고 있다.

카페 주인이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머리를 그려 모으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이곳 주민이세요?"


여인이 말을 걸어온 건, 필시 나로부터 섬 주민을 빙자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 일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모양이 트레이닝 바지에 티셔츠하나 달랑 걸치고 게다가 슬리퍼까지 신고 있으니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텐가?


“글쎄요. 앞으로 1년 넘게 살려고 작정했으니 이곳 주민이라 해도 틀린 말은 이 니겠죠?"


주인여자의 의아함을 덜어주는 현답을 내놓고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내가 왜 처음 봤자?

이틀만 있어도 얼굴이 익는 쪼끄만 섬인데?"


“그게 그러니까 통 밖에 나오질 않아 못 보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가끔 주인댁 배 타고 미역 양식장 일 도와주고 낚시하는 거 외엔 방에서 나오질 않았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셔서 이렇게 오래 계세요?".


“우왕마왕 하는 게 인간의 발인데 어딘 못 가겠습니까? 이 섬을 현직에 있을 때 생태 조사차 몇 번 드나들었는데 그게 게기가 되어 이번에 작품 쓸려고 눌러앉게 됐습니다"


대화는 계속됐고 수다를 닮은 말들의 향연은 담백했다

막 지천명에 들었을법한 여인의 말은 이러했다. 어느 날 여행으로 들어왔는데 이 섬이 너무 좋았더란다. 그 뒤 도시의 염증에 시달리던 여인은 이 섬을 사람대신 사랑하게 됐고 종말엔 도시살이를 정리하고 섬 면사무소에 이름을 올렸다고 했다. 올해로 두 해째 맞는 섬의삶이라 했다.

할 줄 아는 게 커피 만드는 일이고 자신 있는 게 커피 장사라 섬에 어울리지 않는 카페를 차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돈 벌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고 그저 소일거리로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말을 마친 그의 시선이 바다를 좇는 데 그 얼굴에 얼비친 쓸쓸함이 드러났다.

창밖엔 애기 동백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아직 낙화를 미루고 있는 것들을 심술 난 바람이 분분히 날려 버리고 있었다.


아! 봄이란 이런 계절이었구나."

누가 봄을 따스하고 화려한 계절이라고 했나? “


봄 것 이것들, 계절 봄은 마냥 아름다운 것만은 아닌 것이다.

누군가는 꽃과 찬연한 태양을 보며 자지러지도록 행복에 도취할 테고, 또 누군가는 모갱이가 톡 부러지는 꽃과 스러져가는 노을을 보며 보며 쓸쓸해하고 슬퍼하겠지.

마장도 못 되는 섬 길 곳곳에 우둠지까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이, 계절의 뒤안길로 사위며 인간 세상의 허무를 보여 준다.


봄의 실존 본색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가식적인 계절인 것이다.

보지 않았던가?

삼월에 내리는 차가운 겨울 눈발을,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쓸쓸해하는 사람들을..


”살아서 고귀하면 무엇하나 부귀영화도 덧없다 언젠가 해골이 되어 먼지가 되리니, "


해골을 든 햄릿의 일갈이 떠 올랐다.

꽃에게 그리고 꽃처럼 화려함에 물든 사람에게 나도 외치고 싶었다.

화려함에 도취되지 말고 화려함을 길들이라고...


“여기 온 지 2년이 넘었어요. 벌써 세월이 이렇게나 흘러버렸네요 생업이 어업은 아니지만 섬 아낙이 다 됐네요"


”그렇죠 2년이라는 세월은 사람을 바꾸어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섬 생활이 몸에 맞는 옷처럼 편하신가 보군요"


“편하고 안 편하고를 떠나서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그저 섬에 부는 바람에 저를 실려 보냈을 뿐이죠 그렇게 살다 보니 저도 섬으로 불어오는 뭍의 이정표가 된 것 같아요.

도시 지인들은 제가 부럽다며 다문다문 찾아오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슨 작품을 쓰시려고 이 조그만 섬에 눌러앉아게세요?"


“저는, 음 뭐랄까 아무튼 뭘 쓰든 나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쉬운 말로 무엇이든 쓰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흘러 이 섬까지 스며들었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나는 어떤 어렴풋한 내 앞에 나열된 동사의 문장들을 대충 해석해서 이 섬에 기어들어오게 된 것일 테다

그랬다. 그때 문득 이 섬에 감정이입되어 가슴이 들썽되고 있었고, 이런저런 생각할 이유도 무시한 채 난 동녘의 희붐한 빛을 어깨에 들러매고 집을 나왔다. 이런저런 생각할 이유안에는 딸아이들의 염려가 들어있긴 했지만 염려보다 욕망의 면적이 더 넓었기에 아이들의 안부는 현관문고리에 걸어 놓는 게 고작이었다


늘 심홍의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던 소설을 양지로 불러내보자는 늙마의 포부가 만용을 부리고 말았다


도시의 삶 속에 검불처럼 붙어있던, 불면을 유발한 시간들은 섬에 들어온 후 망각의 항아리에 담아 꽁꽁 봉해버렸고 섬 생활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 섬 생활 초반에는 혹시 이곳이 정신병원은 아닌가 생각했었죠.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실체가 없는 무언가가 섬 밖으로 나가질 못하게 했으니 말이에요. 카프카의 빨간 원숭이 피터처럼 무척 노력했어요

피터가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듯 섬사람들의 생활을 흉내 내며 섬사람이 되려고 말이에요!

결국 피터도 사람으로 변신했듯 저도 섬사람으로 변신했죠! 변신에서 정신적 육체적 자유가 오더군요

피터가 사람으로 변신해서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를 찾은 것처럼...

초반 고비들을 넘기고 난 후에는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됐어요. 어쩌면 이곳은 생각처럼 나쁜 곳은 아니라고 느껴져요. 지긋지긋한 경쟁도 없고, 잡다한 의무도 없고, 먹고 자는 일 걱정 없고 무엇보다도 좋은 건, 담배를 마음껏 눈치 안 보고 피울 수 있고요! 물론 숨어서 피기는 하지만 냄새를 타박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막배가 뱃머리를 육지 쪽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카페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이윽고 적요함이 섬을 점령했다. 여행 온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있어야 할 사람들만 남은 섬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허무에 빠져들었다. 그런 횡댕그렁한 포구를 무망무력하게 바라보는 2년 경력의 섬 주민인 그와 초보 섬 사람인 나의 심사는 간단없이 바다에서 잠방거렸다.

2년 경력의 섬 주민인 그도 나와 동질의 것으로부터 눈가에 눈물이 어릉어릉 거렸던 것일 테다.

배가 떠난 포구 맞은편 벚꽃들이 바람에 몸서리를 앓고 있었다.

그 나나나 어쩌다 이 섬에 훠이훠이 스며들었단 말인가?

검문소 바리케이드처럼 엇갈려있어 번갈아 찾아오는 행복, 불행 즐거움, 쓸쓸함

삶 속에 잠복해 있는 불행과 쓸쓸함을 발본색원해서 꽃밭에이르는 길을 어떻게 찾을까?

해서 들어온 섬,

방파제에서 첨벙 거리고 있는 상괭이처럼 나 또한 슬퍼도 웃고 있는 모습이고 싶었다. 죽어서도 웃는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들처럼,

카페의 그녀도 그러했으면 아니 그러하리라 믿어본다. 섬은 뭍과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이 되리라는 생각이 담쏙 밀려왔다.

섬 끄트머리 만장단애에 노을이 걸려 쩔쩔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