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가 30억을 넘긴 날, 임세진은 중환자실에서 일곱 번째 시신을 옮기고 있었다.
하얀 시트 아래로 손이 삐져나와 있었다. 마흔 넘은 남자의 손이었다. 백신을 맞은 지 이틀째. 세진이 직접 주사를 놓았다. 접종 직후에는 괜찮았다. 미열, 근육통, 통상적인 면역반응. 사흘째부터 장기가 하나씩 멈췄다. 심장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로트도 치사율 60% 넘었어." 옆 병상에서 동기 한결이 말했다. 그의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WHO에서 뭐라 하대?"
"부작용이래."
"60%가 부작용이야?"
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도 같은 백신을 맞았다. 같은 로트, 같은 날짜. 세진은 살았고, 침대 위의 남자는 죽었다.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의학적 근거는 없었다.
두 달 뒤, 생존율 통계가 확정되었다. 백신 접종자 54억 중 22억 사망. 치사율 40.7%.
세계는 애도했다. 각국 정부는 백신 제조사를 기소했고, 제조사는 파산했고, CEO는 자살했다. 사태는 그렇게 종결되는 듯했다. 살아남은 32억은 무너진 세계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도로를 고치고, 작물을 심고, 아이들을 다시 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세진이 처음 알아챈 건 체력이었다. 간호사 12년 차의 만성 허리 통증이 사라졌다. 잠을 네 시간만 자도 개운했다. 시력이 좋아졌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건강해졌다.
한결이 퇴근길에 말했다. "나 요즘 이상해. 감정이 달라졌어."
"어떻게?"
"화가 안 나. 진짜로. 뉴스 봐도, 환자한테 욕먹어도. 예전 같으면 벽이라도 쳤을 텐데." 한결이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 뭔가가 달라진 느낌이야."
세진은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자신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한결 말이 맞았다. 분노의 회로가 무뎌져 있었다. 슬픔도 마찬가지였다. 22억 명이 죽었는데, 세진은 석 달 전의 비통함을 재현할 수 없었다. 기억은 있되 감각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볼륨을 절반으로 낮춘 것처럼.
대신 다른 것이 올라왔다. 확신. 세계는 복구될 것이다. 살아남은 우리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 것이다.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재생되었다. 자기 생각 같았다. 아니, 자기 생각이 맞았다. 아마도.
진실은 내부고발로 밝혀졌다. 백신 제조사의 전 수석연구원이 유서와 함께 데이터를 공개했다.
백신에는 바이러스 항원 외에 나노봇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름 80나노미터. 적혈구보다 작은 구조체가 혈류를 타고 전신에 퍼졌다. 나노봇의 임무는 두 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1단계. 선별. 나노봇은 숙주의 유전자, 면역 반응, 장기 기능, 신경 가소성을 종합 평가했다. 일정 기준에 미달하면 세포 자멸을 유도했다. 심장이 마지막으로 멈추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연구 노트에 적혀 있었다. 22억 명의 죽음은 부작용이 아니었다. 설계였다.
2단계. 이식. 선별을 통과한 숙주의 뇌에 나노봇이 미세 구조물을 형성했다. 편도체와 전전두엽 사이에. 공포와 분노의 역치를 높이고, 특정 사고 패턴을 강화하는 신경 보조장치. 연구 노트는 이렇게 기술했다. 선별된 개체군은 협력 지향적 사고, 갈등 회피, 권위 수용성이 자연 상태 대비 340% 증가할 것으로 예측됨.
세진은 그 문서를 병원 탕비실 모니터로 읽었다. 손이 떨렸다. 떨려야 했다. 하지만 떨림은 2초 만에 멈추었다. 편도체에 박힌 나노 구조물이 공포 반응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이거 사실이야?" 한결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사실이야."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
"있어. 지금도."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해야 할 순간이었다. 22억을 죽인 자들에게, 살아남은 자들의 뇌를 조작한 자들에게. 한결의 얼굴 위로 미세한 경련이 지나갔다. 감정이 올라왔다가 나노 구조물에 부딪혀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파도가 방파제에 부서지듯.
"근데 있잖아." 한결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지금 화가 나야 하는 거 알아. 근데 안 나. 그리고 그게…… 편해."
세진은 한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온순한 평화가 깔려 있었다. 32억 명 모두의 눈에 깔려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평화.
내부고발 이후 세계는 이틀 동안 술렁였다. 이틀이 전부였다.
소셜미디어에 분노의 게시물이 올라왔다가, 올린 사람 스스로 삭제했다. 시위대가 광장에 모였다가 한 시간 만에 해산했다. 모두가 머리로는 분노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가슴에서 분노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노 구조물이 감정의 원료를 차단하고 있었다.
일주일 뒤, 유엔 사무총장이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 비극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32억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나아가자는 문장이 뇌 속에서 공명했다. 합리적이었다. 건설적이었다. 자기 생각이었다.
세진만 밤마다 탕비실에 앉아 연구 노트를 다시 읽었다.
0.4초. 나노 구조물의 반응 속도. 감정이 생성되고 억제되기까지의 시간. 세진은 그 0.4초의 틈을 느낄 수 있었다. 분노가 올라왔다가 꺼지는 찰나. 슬픔이 차올랐다가 빨려 들어가는 순간. 그 틈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진짜 감정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 틈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0.4초가 0.3초가 되었다. 곧 0.2초가 될 것이다. 나노 구조물은 학습했다. 숙주의 신경 패턴에 적응하여 더 빠르게, 더 정밀하게 감정을 절단했다.
세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 의문을 품는 것도 내 의지인가. 아니면 나노봇이 허용한 범위 내의 저항인가.
마지막 밤, 세진은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텅 빈 병상들 사이를 걸었다. 석 달 전 이곳에 누워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흔 넘은 남자의 삐져나온 손. 나노봇이 부적합 판정을 내린 사람의 손. 세진은 그 손을 잡아주었던 감각을 기억했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에 대한 슬픔이 올라왔다.
0.3초.
슬픔이 꺼졌다. 대신 이런 생각이 채워졌다. 그들의 희생은 의미가 있었다. 살아남은 우리는 더 강하고, 더 협력적이고, 더 나은 종이다.
세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문장이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사실이 가장 무서웠다. 거부감이 없었다. 거부감을 느끼는 회로 자체가 이미 재배선되어 있으니까.
복도 끝 창문 너머로 새벽이 오고 있었다. 도시는 고요했다. 범죄도, 시위도, 야간의 고성방가도 없는 완벽한 고요. 32억 명의 선별된 인류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세진은 자기 손목의 맥박을 짚었다. 규칙적이고 강건한 박동. 선별을 통과한 심장.
0.2초.
무언가가 올라왔다가 꺼졌다. 너무 빨라서 그것이 분노였는지 슬픔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틈이 거의 닫히고 있었다.
세진은 창밖을 보았다. 곧 아침이 오면 출근하고, 환자를 돌보고, 동료들과 웃을 것이다. 진심으로 웃을 것이다. 그 진심이 어디서 온 것인지 더 이상 묻지 않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떠올리자고 생각했다. 죽은 남자의 차가운 손. 그 감각.
0.1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었다. 건설적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복도에서 새벽 조명이 부드럽게 켜졌다. 세진은 미소를 지었다. 32억 명과 같은 곡률의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