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좀 하는 사람은 처음 가는 나라에서도 잘 먹는다.
재료가 낯설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불 조절의 감각, 간을 보는 타이밍, 식재료의 익는 속도를 보는 눈. 이런 건 레시피에 안 적혀 있다. 한국 요리를 하면서 몸에 밴 것들이, 태국 시장에서 팟타이 재료를 고를 때도 작동한다. "이건 금방 익겠다" "이건 마지막에 넣어야 한다" — 요리라는 경험이 국경을 넘어 옮겨간 것이다.
반대로, 요리를 전혀 안 해본 사람은 레시피가 있어도 헤맨다. "중불에서 3분"이라고 적혀 있는데, 중불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레시피는 같은데 결과가 다르다. 차이는 정보가 아니라 경험이다. 옮겨갈 수 있는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
AI에서 이걸 전이학습(Transfer Learning)이라고 부른다.
어떤 AI 모델이 고양이 사진 100만 장을 학습했다고 하자. 이 모델에게 갑자기 "이번엔 개를 구분해봐"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처음부터 다시 배울 필요가 없다. 고양이를 학습하면서 익힌 것들 — 윤곽선을 감지하는 법, 털의 질감을 구분하는 법, 눈과 코의 위치 관계를 파악하는 법 — 이게 개를 인식할 때도 그대로 쓸 수 있다. 이미 배운 하위 능력을 새 과제에 가져다 쓰는 것. 그래서 개 사진 1만 장만으로도 꽤 정확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처음부터 했으면 100만 장이 필요했을 일이다.
GPT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텍스트 수십억 개를 학습하면서 익힌 언어의 구조, 맥락 파악, 논리적 추론 — 이 능력이 의학 논문 요약에도, 법률 문서 분석에도, 시 쓰기에도 옮겨간다. 전부 따로 학습한 게 아니다. 하나의 기반 위에서 파생된 것이다.
핵심은 이거다. 모든 경험은 그 경험 자체보다 넓은 곳에 쓸 수 있다.
사람에게 전이학습은 어떻게 작동할까.
나는 글을 쓴다. 그리고 이 글 쓰는 능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면, 글쓰기를 배워서 온 게 아니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면서 투자자에게 사업 계획을 설명한 경험. 복잡한 기술을 비전공자에게 풀어야 했다. 그때 익힌 건 "상대방이 모르는 걸 전제하고 말하는 법"이었다. 이게 글 쓸 때 그대로 옮겨온다. 독자가 뭘 모르는지 먼저 생각하는 습관.
대학원에서 논문을 읽으면서 익힌 건 "주장과 근거를 분리하는 눈"이었다. 이건 에세이를 쓸 때 구조를 잡는 데 그대로 쓴다. 논문과 에세이는 전혀 다른 장르인데, 뼈대를 세우는 감각은 같다.
심지어 요리도 도움이 된다. 재료를 손질하고, 순서를 정하고, 불 조절을 하고, 마지막에 간을 보는 것. 글쓰기도 똑같다. 재료(소재)를 모으고, 순서(구성)를 정하고, 강약(톤)을 조절하고, 마지막에 퇴고(간)를 본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쓴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프로세스의 구조가 닮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경험의 전이 가능성을 모른다.
이력서를 쓸 때 이게 드러난다. "경력: A회사 마케팅 3년." 이렇게 쓴다. 하지만 3년 동안 실제로 익힌 건 마케팅만이 아니다. 고객의 반응을 데이터로 읽는 법, 팀원과 의견이 다를 때 조율하는 법, 마감 압박 속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 이건 마케팅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직업에서 쓸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본인은 "나는 마케팅밖에 모른다"고 생각한다. 경험을 직무에 가둬버린다. AI로 치면, 고양이 모델이 "나는 고양이밖에 못 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니, 너는 이미 윤곽선을 읽고 질감을 구분하는 법을 안다. 개도 보고, 토끼도 보고, 자동차도 볼 수 있다.
경력을 바꾸는 게 두려운 이유 중 하나가 이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공포. 그런데 전이학습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기존에 쌓은 레이어 위에 새 레이어를 올린다. 마케팅 3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3년이 다음 직업의 기반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게 있다. 모든 경험이 모든 곳에 옮겨가지는 않는다.
AI에서도 전이학습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고양이를 학습한 모델에게 "음성을 인식해봐"라고 하면 안 된다. 이미지에서 배운 것은 이미지에 옮겨갈 수 있지만, 소리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도메인이 너무 다르면 전이가 안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요리에서 익힌 순서 감각이 글쓰기에 옮겨가는 건, 두 영역의 구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리를 잘한다고 수학을 잘하게 되지는 않는다. 전이가 일어나려면, 두 영역 사이에 공유되는 하위 구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건 "내가 뭘 했는가"가 아니라 "거기서 뭘 배웠는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마케팅에서 배운 게 '마케팅 기법'이면 마케팅에서만 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주의를 끄는 법'을 배운 거라면 — 그건 교육에도, 글쓰기에도, 발표에도, 유튜브에도 옮겨간다.
경험을 추상화하는 능력. 그게 전이학습의 전제 조건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 모든 경험은 그 경험 자체보다 넓은 곳에 쓸 수 있다. 요리의 감각이 글쓰기에 옮겨가고, 사업의 경험이 연구에 옮겨간다. 당신은 생각보다 많은 걸 이미 알고 있다.
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새 분야에 가도 기존 레이어는 남아 있다. 이직이 아니라 전이다.
셋. 단, 전이는 자동이 아니다. "거기서 뭘 배웠는가"를 추상화할 수 있어야 옮겨간다. 경험을 직무에 가두지 마라.
AI가 고양이를 학습하면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운 것처럼, 당신도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삶 전체에 쓸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 다만 아직 그걸 모를 뿐이다.
다음에 "나는 이것밖에 못 한다"는 생각이 들면, 한 번 물어보라. 여기서 내가 진짜 익힌 건 뭘까. 답이 특정 기술이 아니라 감각이나 구조일 때 — 그건 어디든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