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어강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벌써 10년 전이다.
교재를 펴고, 아이들 이름을 외우고, 시험지를 만들고, 학부모 상담을 위한 학생일지를 작성했다.
매일 비슷한 하루가 반복됐지만, 내가 그 하루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쓸모 있고, 내가 만든 작은 리듬이 하루를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
그러다 일을 그만뒀다.
처음에는 잠시 쉬는 거라고 생각했다.
출산, 육아, 그리고 가정.
온통 처음 해보는 것들이었지만 다시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달라졌다.
집은 조용했고, 이따금 나를 부르는 아이의 소리.
오후 세 시가 되어도 여전히 집은 조용했고, 아이와 나 둘 뿐이었다.
지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가끔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내가,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일’은 멈췄지만, 머릿속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엄마 말고, 아내 말고, 가정주부인 나 말고.
그 질문들이 쌓이면서, 오히려 나를 조금씩 다시 바라보게 됐다.
집 안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아이의 재잘거림, 울음, 짜증, 웃음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혼자 감당해야 할 전부였다.
아이를 품에 안고 밥을 먹이고,
재우고,
치우고,
다시,
또.
‘최대한 가정보육을 해보다가 유치원에 보내야지’
쉴 틈도 없이 하루가 끝났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코로나가 왔다.
내 바람은 무참히 무너졌다.
세상은 그렇게 멈췄지만 육아는 멈추지 않았다.
문을 닫은 것은 사회였지, 엄마인 나는 24시간 대기상태였다.
하루 중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고,
내 감정을 물어주는 이도 없었다.
누군가 “그래도 아이랑 함께여서 좋지 않냐” 고 말할 때면,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속은 무너졌다.
동시에 이런 마음이 드는 내가
모성애가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까지.
‘나는 지금,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마음에 내려앉았다.
어느 날은 그냥 아이 옆에 누워서 창밖을 멍하니 봤다.
울지 않는 아이, 조용한 집, 흐르는 햇살.
어느 때와 다를 게 없는 오후 2시쯤.
그 순간 처음으로, ‘나도 괜찮아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의욕이 샘솟았다.
내 감정을 글로 써 내려가고,
작은 루틴을 만들고,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사 왔다.
작은 변화였지만 내 안에서는 무언가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오늘‘을 마주했다.
아이를 돌보는 일 사이에, 나를 조금씩 꺼내보았다.
일이 없어도, 이름이 없어도,
나는 나로 살아있는 중이었다.
조용히, 깊게, 조금씩 나를 회복해 갔다.
이 글은 5편 완결 에세이 시리즈
<일을 멈춘 순간, 삶이 시작됐다> 입니다.
1. 일을 그만두고 나를 바라본 하루
2. 가정주부로 사는 건 쉬운 줄 알았다
3. 엄마는 쓰러질 수 없다
4. 나를 채우는 연습
5. 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