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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에 박힌 삶도 괜찮은 삶이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by 글쓰는 워킹맘
대개의 사람들이 틀에 박힌 생활의 궤도에 편안하게 정착하는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던 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그러고 보니 서머싯 몸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다. <인생의 베일>과 <면도날>, <인간의 굴레>, <케이크와 맥주> 그리고 이번 작품 <달과 6펜스>까지. 나도 모르게 작가 편식을 하고 있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뭔가 통해서일까. 그의 이야기에서 나를 비춰보고 있어서일까.


<달과 6펜스>는 오로지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기 위해 낯선 곳으로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고갱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이다. 마침 그가 틀에 박힌 일상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출발했던 나이가 마흔일곱. 지금의 내 나이가 아닌가. 흠칫 놀라 책 읽기를 멈췄다. 이번에 다시 읽는 것이 벌써 네 번째인데 그때마다 나를 건드리는 문장과 상황이 다르다. 이것이 고전문학 읽기의 즐거움이고 묘미이다.


타히티, 이곳이 바로 그가 자신의 명성을 확립시켜 준 그림들을 그려 낸 곳이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아도, 그림을 보는 일은 즐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찾아낸 나만의 즐거움이다. <달과 6펜스>를 읽다가 고갱의 그림을 찾아 같이 보면 읽고, 보고, 느낀다. 나에겐 저 정도의 열정은 없는 것 같아 주인공이 부럽기도 하고, 한심스럽게 보이기도 하다. 틀에 박힌 삶은 그릇된 삶이 아니다. 틀에 박혔다는 것은, 어쩌면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져 어쩔 수 없이 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어렴풋이 짐작은 한다. 성장을 하고, 성공을 하려면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변하지 않으면 더 나아질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시간이 어디 있소? 연애도 하고 예술도 할 만큼 인생이 길진 않소."-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세상에나, 이것저것 다 제대로 하려다간 무엇 하나 해내지 못하는 게 수두룩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우리는 잊고 산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많은 것들을 미루고 또 미룬다. 언젠가...로 미뤄뒀던 일을 써보라면 100가지라도 쓸 수 있다. 그런데도 또 미룬다. 그리고 이것도 적당히, 저것도 적당히 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중년이 된다. 남자든 여자든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고 사는 방법도 점검해야 하는 시기, 바로 갱년기와 맞닥뜨린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그야말로 벼락 맞은 듯 갑자기 말이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뭔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어쩌면 나는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갱년기가 시작되었는데, 마음은 60, 70대라도 된 듯 허무하고 무기력할 때가 많다. 이럴 때 틀에 박힌 삶이 나를 지탱해 준다고 생각하면 진정된다. 당장 가정과 회사를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야 없다. 고갱이 그랬던 것처럼 오직 하나만을 위해 인생을 불태울 수는 없다. 나에게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아직 더 키워내야 하는 두 아이들, 영원한 내 편이면 좋을 남편과 나의 일, 직장에서의 자리,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 매일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면 가정을 살피는 이 일상이 틀에 박힌 듯해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다. 이렇게 고갱의 인생에서 또 하나를 배운다. 틀에 박힌 삶도 내 나름으로 괜찮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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