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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에 또 속은 당신

by 김형준

애순은 국민학교 때부터 글을 곧잘 썼고 작가를 꿈꾼 문학소녀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팍팍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관식과 하룻밤 불장난이 되고 만 야반도주를 감행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관식의 엄마에게 붙잡혔고, 퇴학을 당하며 애순의 바람은 한낱 꿈이 되고 맙니다. 꿈은 멀어졌지만, 애순은 관식과 더 가까워졌고 결국 둘은 평생을 함께 하게 됩니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동안 그녀는 시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큰딸 금명이 선물한 노트 한 권은 애순이 애써 모른척해왔던 시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였습니다. 중년의 애순에게 삶은 여전히 시끌벅적했지만, 틈틈이 쓰는 시가 그녀를 소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도 국민학교를 6년 동안 다녔습니다. 상이라고는 개근상이 전부였습니다. 남다른 재능이 없어서 남들 앞에서 상을 받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공부가 제일 어려웠지만 그나마 성적은 중간을 유지했습니다. 성적에 대한 욕심이 없었습니다. 공부는 노는 시간을 빼앗아가는 존재였습니다. 어설픈 자존심 덕분에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애순처럼 글쓰기에 소질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음악과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오로지 생각 없이 뛰어노는 게 적성에 맞았었습니다. 그러다 중년이 된 어느 날 뜬금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글도 쓰기에 이릅니다. 단순한 호기심에 시작한 읽고 쓰기가 지금은 직업이 되고 일상이 되었습니다. 펄펄 끊는 열정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펄떡이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글을 써내고 있습니다.


애순이 모른척해왔던 열정에 불을 붙인 건 딸이 선물한 노트 한 권이었습니다. 마흔이 넘어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어느 날 읽은 책 한 권이었습니다. 노트 한 권이 잠자던 열정에 불을 붙이고,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에 돌을 던졌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장작에 불이 붙었다고 모두 다 잘 타는 건 아닙니다. 불씨가 약하면 얼마 못 가 꺼지고 말지요. 노트 한 권이 열정에 불씨가 될 수는 있어도 계속 타오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불꽃을 일으키는 바람이 필요하듯 다음으로 이어질 어떤 게 꼭 필요하죠.


중년의 애순은 시끌벅적함 속에서 일상을 소재로 꾸준히 시를 썼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글감으로 말이죠. 중년의 저도 여전히 직장을 오가며 일상을 소재로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마찬가지로 오감으로 전해지는 모든 걸 글감으로 삼아서요. 만약에 더 크게 타오르겠다며 작정하고 글만 썼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물론 짧은 시간 동안 조금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보다는 삶의 한 부분에 글쓰기가 자리해 마치 세끼 밥을 먹듯 글을 쓴다면 어떨까요? 글을 쓰기 위해 각오를 다질 필요도, 잘 써내겠다는 의지도, 잘 써야 한다는 강박도 줄어들지 않을까요? 우리가 세끼를 먹기 위해 각오도 의지도 강박도 필요 없는 것처럼 말이죠. 해가 뜨는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자는 게 당연한 것처럼요.


무슨 일이든 잘하기 위해서 열정은 필요합니다. 그 열정은 어디서 올까요? 꾸준한 반복에서 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숯이 되는 나무는 따로 있다고 합니다. 또 숯으로 만드는 과정을 견뎌야 오래 타는 숯이 될 수 있고요. 그 시간을 견뎌내는 힘이 결국 좋은 숯으로 다시 쓸모를 갖게 되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에 의지해 시작은 할 수 있지만, 과정을 견디지 못하면 열정은 금방 사그라듭니다. 열정에 속아서 어설피 시작했어도 자신을 믿고 꾸준히 밀고 나가면 더 큰 열정이 보상처럼 주어집니다. 또 하나 열정이 타오르게 바람 역할을 하는 건 일상을 놓치지 않는 거죠.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건 일상에서 발견한 글감 덕분입니다. 그 글감들이 결국 불쏘시개이자 바람이 되어준 거죠.


글뿐만이 아닙니다. 저마다 이루고 싶은 게 다 다릅니다. 그게 무엇이든 열정은 기본이고 꾸준함은 필수입니다. 그러기 위해 특별한 하루하루가 필요한 게 더더욱 아니죠.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지치지 않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 힘이 결국 이루고 싶은 것들에 한 발씩 다가서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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