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1)

by 김형준

어머니는 남편 복이 없었다.


24살 꽃다운 나이에 첫째를 낳았다. 그리고 2년 뒤 둘째를 낳았다. 또 2년 뒤 나를 낳았다.

결혼식 사진에 세 아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림부터 시작했음을 짐작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릴 땐 아들이 있는 결혼식 사진이 당연한 줄 알았다. 어느 집이나 그렇게 찍는 거라 믿었다. 결혼식의 의미를 몰랐을 때였다. 결혼식 사진으로 알 수 있듯 어머니의 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정상적이 못한 시작은 이후 모든 불행의 전주곡이 되었다.


아버지는 무능력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당신의 결혼생활이 혹독했다고 믿으신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두 분은 부산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한 두 해는 그랬다고 했다. 아버지는 직장을 다녔지만 어머니 손에 쥐어지는 월급은 절반도 안 되었다. 절반은 좋게 말해 품위 유지비였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친구도 좋아하셨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가장은 가정에 소홀하다. 가정에 소홀한 가장은 아내를 힘들게 했다. 아이도 힘들게 했다. 어머니와 우리 세 아들은 아버지 덕분에 힘든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절반의 월급으로 세 끼 먹는 것조차 힘들었다. 어머니는 세 아들을 굶길 수 없었다. 그때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주변 분들에게 얼마의 돈을 빌려 가게를 마련했다. 솜씨가 좋아 금방 자리 잡았다.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 덕에 아버지는 딴생각을 먹게 된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장사에 뛰어들었다. 부부가 같이 장사에 뛰어든 경우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대박을 내던가 쪽박을 차던가. 결과적으로 쪽박이었다.

아버지는 나름 귀하게 자라셨다. 이른 나이에 당신의 아버지를 잃긴 하셨지만 한 집안의 장손이라 부족한 것 없이 배웠다고 들었다. 그런 탓에 장사는 적성에 맞지 않았던 같다. 두 분이 장사를 시작했지만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직장을 다녔던 아버지도, 장사를 하는 아버지도 친구를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장사로 버는 돈 대부분은 술 값으로 나갔다고 들었다. 그 덕에 장사마저 힘들어졌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나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시장 한쪽 반 평짜리 평상이 다섯 식구의 거처였다. 자다가 몸을 돌리면 떨어질 만큼 좁은 평상이었다. 그곳에서 몇 번 떨어진 탓에 어머니의 허리는 아직도 통증을 달고 사신다. 두 분은 다시 시작했다. 합심해 다시 시작한 덕분에 짧은 시간 내 번듯한 가게를 얻을 수 있었다. 맛과 정으로 소문난 덕분에 생활은 안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고생이 끝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아버지가 친구와 술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말이다.


아버지의 주정이 어머니를 쫓았다.


아버지가 친구와 술을 먹고 들어온 밤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인사불성인 아버지는 어머니를 괴롭혔다. 괴롭힘이 심해지면 폭력으로 이어졌다. 싸움이 시작되면 빨리 끝나길 바라며 자는 척했다. 자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눈을 감고 싸우는 소리가 끝나길 바랐다. 싸움이 격해질 경우 화를 참지 못한 아버지는 자는 우리까지 깨웠다. 깨면 더 힘들어졌다. 두 분을 말리기 위해 끼어들면 아버지의 주사는 어김없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어머니는 우리까지 지켜야 했다. 초등학생이던 그때 내 기억 속 그 상황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폭력, 어머니의 절규를 보며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건 우는 것뿐이었다. 그 눈물엔 공포와 불안이 담겼었다. 그럴수록 아버지를 증오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측은해졌다. 수 차례 이어진 과격한 싸움 탓에 살림은 남아나지 않았다. 살림살이가 하나씩 부서질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도 돌아서고 있었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우리를 두고 집을 나가셨다. 당신이 살아야겠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정신 차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다. 어머니는 우리는 짐작할 수 없는 여러 이유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별다른 연고 없었던 어머니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거의 없었다. 숙식이 해결되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부잣집에 살림해주는 '아줌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손이 야무졌던 어머니는 어디디를 가도 인정받았다고 하셨다. 살림이면 살림, 음식이면 음식, 아이들 케어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고 했다. 원래 딱 부러지는 성격 탓에 일 하나만큼은 똑 소리 나게 하셨다. 그런 성격이셔서 그나마 우리가 이만큼 자랄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수개월을 이산가족이 되어 살았었다.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떼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선택을 지금은 이해한다. 다만 그때 어머니의 선택은 별 다른 효과가 없었다. 자식들 탓에 다시 합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에도 아버지의 행동은 여전했다.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성장했고 두 분은 기력이 빠졌다는 거다. 성장한 자식들 눈치 탓에 싸움의 강도는 줄었고 횟수도 줄었다.

결혼 30년 만에 졸혼하다. 그러나...


좋게 말해 졸혼이고 원래는 이혼이다. 어머니 30년 결혼 생활 동안 우리를 지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 마음 하나로 아버지의 폭력도 견뎠고, 남의 집 아줌마 역할도 견뎠고, 힘든 장사도 거뜬히 해 내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생각이 좀 다르셨다. 결국 자식을 버렸다. 아니 우리는 어머니를 선택했다. 우리가 아버지를 포기했다. 남은 시간만큼은 어머니가 편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20년 전 우린 네 식구로 다시 출발했다. 이혼 후 몇 해는 슈퍼를 운영한 덕분에 생활이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이 들수록 슈퍼 운영이 벅찼는지 이내 괜찮은 조건으로 원하는 이에게 넘겼다. 이후 한 동안은 일 없이 한가로운 생활을 사셨다. 그때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제대 후 바로 독립했고 결혼할 때까지 혼자 살았다. 작은 형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일을 시작했고 줄곧 자기 벌이는 하고 살았다. 하지만 큰 형은 달랐다. 어머니에게 큰 형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커가며 이런저런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건강 탓도 있었지만, 성격이 예민했던 탓에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했다. 직업을 갖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큰 형이 무언가 시작할 때면 항상 어머니의 지원이 있었다. 어머니는 큰 아들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큰형도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늘 자신 때문에 힘든 어머니에게 미안해했다. 하지만 건강을 잃기 시작했을 땐 자신도 어쩔 도리 없이 어머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 하고 싶은 일을 갖게 된 건 서른 후반이었다. 취미로 시작했던 사진이 업이 되었다.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고 했다. 그때까지 가졌던 여러 일 중 가장 열정적이었다. 학생들 수학여행에 동행하면 추억을 담아주었고, 생에 가장 아름다운 두 사람의 시작을 알리는 결혼식 장면을 담았고, 한 생명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기억하기 위한 추억도 찍어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형을 찾았다. 일을 할수록 건강이 나빠진 건지, 건강이 나빠질 즘 일이 많아졌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확실한 건 사진 찍는 일을 할수록 건강은 악화되어 갔다. 그런 형을 곁에 둔 어머니는 병 챙기랴 생활비 대랴 녹녹지 않은 삶을 이어가야 했다. 환갑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다시 한번 남의 집 생활을 시작하셔야 했다. 형의 병원비는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큰 아들의 병과 병원비만큼은 당신 스스로 해결하는 게 남은 자식들을 위한 거라 여기셨다. 형은 당뇨와 신장 기능이 급속히 가져 갔다.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시력도 잃어갔다. 겨우 평생 업을 찾았지만 그걸 끝까지 못 할 수 있다는 건 당사자에겐 절망이었을 거다. 어쩌면 그런 절망이 형을 더 사진에 짐 착하게 했을 거고, 짐착이 강해질수록 건강은 더 악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 거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그런 형을 지켜보며 무기력하셨다. 말려도 말려지지 않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오버랩된다고 하셨다 어쭙잖은 남성 우월감과 방향을 잘못 잡은 자존감 탓에 번번이 당신을 힘들게 했다고 기억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를 빼닮은 형을 꺾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부딪힐 때면 아버지와의 일이 떠올라 스스로 포기했을 수도 이다. 갖은 노력에도 결국 형의 건강은 손쓸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 버렸다. 시력은 사물만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고,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해야 하는 몸 상태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 자책하셨다. 자랄 때 제대로 못 먹이고, 건강검진 한 번 제대로 못 받고, 아파도 맘 놓고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셨다. 부모라는 이유로 평생 자책하면 살게 되었다. 자식을 못 지켰다며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셨다. 정작 벌을 받아야 할 이는 따로 있었지만 그마저도 다 어머니의 몫으로 여기셨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결과는 가혹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