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열심히 사셨지만......

나의 어머니(2)

by 김형준

아버지도 열심히 사셨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당연히 나의 아버지도 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책임을 다 하셨다. 하지만 그릇된 선택은 책임의 의미를 무색하게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살 터울이었다. 자라온 환경이 많이 달랐다. 어머니는 버스도 닿지 않는 깊은 어촌 마을에서 자란 탓에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1950년 대 삶은 모든 게 부족했을 때다. 당연히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다. 어른들 틈에서 보고 들은 게 교육의 전부였다. 다만 생존을 위한 생활력만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도시에서 자랐다. 태어나고 얼마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후 가세가 기울었다고 했다. 그래도 장손이라 고등학교 교육까지 받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성장 배경이지만 두 분만의 꿈을 갖고 새 삶을 시작하셨다.

내가 24살 때 두 분은 각자의 삶을 선택하셨다. 그때까지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여섯 살부터다.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무일푼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흘러 흘러 자리 잡은 게 성남의 한 시장이었다. 어머니 그때부터 장사를 시작하셨고, 아버지는 직장을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정상적인 직업이 아닌 임시로 잠깐씩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장사로 터를 잡게 되면서 아버지도 함께 하게 되었다. 만약 아버지가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 직장을 다니셨다면 어땠을까? 짐작컨대 우리 모두 다른 삶을 살았을 것 같다. 직장을 갖지 못했던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장사를 하면 안 되었다. 장사를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의존이란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줄곧 지켜본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독립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추진력도, 결단력도, 계산적이지도 못했다. 아무리 작은 구멍가게도 각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역할을 못하면 규모를 떠나 남은 한 사람은 두 사람 몫을 해내야 한다. 두 사람 간의 보이지 않는 약속이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다. 아버지는 책임감이 부족했다. 친구를 좋아했고, 노는 걸 즐겼다. 친구를 좋아하고 노는 걸 즐기면 당연히 술이 따라온다. 어머니라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 술도 마음 편히 드실 수 있었다. 모든 불화는 술에서 비롯되었다.


가장의 역할은 지켜봤지만 남자로서의 삶을 들여다보진 못했다. 가족의 미래를 위해 어떤 꿈을 갖고 계셨는지 모른다.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사춘기를 지날 때도 아버지와 크게 부딪히지 않았다. 공부를 잘해도, 못해도 언제나 격려와 응원은 아끼지 않으셨다. 진로를 선택할 때도 당신의 뜻보다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잔소리는 적었지만 다정하지도 않았다. 항상 쉽게 넘지 못하는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느낌이었다. 고리타분한 권위보다 친근하지만 가볍지 않은 위엄을 갖고 계셨다. 자식과의 거리를 잃지 않으려 꾸준히 노력하셨다. 하지만 한 번씩 술로 인한 주사는 마음의 벽을 쌓게 했다. 아버지의 주사는 시간이 갈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더욱 그랬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러 이유 중 가장의 무게가 버거워 드셨을 수도 있다.

나도 가장이 되어보니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땐 오히려 배우자의 이해를 바라고 위로를 받는 게 더 큰 위안이 될 수도 있다. 가정은 혼자 꾸리는 게 아니니 말이다. 한편으로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가 받아주고 이해해 주지 않아 마음의 거리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반대되는 성격 탓에 서로를 이해하는 교차점을 알지 못하고 평행선만 긋고 있었을 수도 있다. 배우자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남자는 외롭다. 어쩌면 경제적인 능력이나 성향을 떠나 무조건 지지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배우자여야 한다. 만약 이런 부분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채워주지 못했다면 한 번 난 상처가 시간을 더할수록 곪아갈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는 성격이 급했다.


두 분이 시작한 장사가 잘 되었다면 우리 가족의 삶도 순탄했을 거다.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생활은 여유로웠을 수 있다. 하지만 이후로도 일 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장사를 접은 뒤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어머니 남의 집 살림을 대신해줬고, 아버지는 특별한 직업 없이 건설 현장을 오갔다. 이런 생활이 이어가다 적은 돈이라도 모이면 또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어림잡아 다섯 번은 시도와 실패의 연속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부분의 장사는 시작 후 3년이 고비였고, 언제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손에 쥔 것 없이 허무하게 끝내야 했다. 성격이 다른 두 분은 항상 부딪혔고 진득함이 부족하고, 허세 부리길 좋아하는 아버지는 장사에 크게 보탬이 못 되었다. 장소와 업종만 바뀔 뿐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의욕적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 건설현장 경험을 살려 기능공 몇 명과 시공일을 시작하셨다. 일만 끊이지 않으면 장사보다 낫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운이 안 따랐다. 몇 달 뒤 추락 사고가 났다. 몇 층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제법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가족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평소 아침을 잘 챙겨 드셨는데 그날은 뭐가 바쁘셨는지 식사도 제때 못했고, 며 칠 간 이어진 작업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높은 곳에 오르자 현기증으로 중심으로 잃고 떨어지셨다고 한다. 다행인 건 쌓여 있던 모래 위로 떨어져 그나만 덜 다쳤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사망사고로도 이어질 수 있는 높이였다고 들었다. 다친 곳 중 다리 골절이 가장 심했다. 몇 번의 수술이 이어졌고, 한쪽 발을 저는 평생 장애를 갖게 되었다. 건설사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충분한 치료와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전해왔다. 돈 보다 아버지의 건강이 우선이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충분히 치료받길 원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번에도 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다. 수술이 마무리되고 물리치료도 받아야 했지만 조급함에 조기 퇴원을 원하셨다. 어머니와 의사는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완강하셨다. 어쩌면 그런 조급함 때문에 다친 발이 온전히 안 나았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조급함은 이 사고 말고도 언제나 일을 망치는 쪽이었다. 장사를 위해 가게에도 진득하게 붙어있지 못했고, 일용직 일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수시로 새로운 일을 시도했지만 얼마 못가 포기하길 반복하셨다. 타고 난 성격일 수도 있다. 자라온 환경 탓에 힘든 일을 오래 하고 싶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어쩌면 가족을 위해 벌이가 좋은 일을 찾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의 가능성을 실험하며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아버지의 선택은 언제나 최선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떤 고민과 노력을 하셨는지 모른다. 어디에 가치를 두고 최선을 다 하셨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삶은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도 중요하다. 결과가 빛을 발하기 위해 과정도 만족스러워야 한다. 반대로 과정이 충분하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힘들다. 시간이 지난 지금 어머니와의 관계, 자식들과의 유대감, 경제적 상황 등 여러 면을 보면 아버지의 노력은 과정만 요란했던 거라 생각한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삶을 평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느 자식도 부모의 노력을 평가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의 글은 나의 관점이기보다 어머니의 시선으로 쓰고자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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