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 같은 아침

by 김형준


티끌 없는 백지에 점을 찍는 게 부담된다. 어디에 찍어야 할지 갈팡질팡이다. 겨우 점 하나이지만 그 점이 찍히는 순간 백지는 더 이상 백지가 아니다. 그다음 점찍기는 부담이 훨씬 준다. 점 하나로 인해 애라 모르겠다 낙서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히려 부담감이 사라진 그때부터 머릿속에서 상상하지 못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경계가 허물어지면 혼란이 시작되는 것처럼.


혼란은 다양한 충돌을 만들어 낸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성질을 이어 붙이기도 해 보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갈 용기를 내기도 한다. 낯선 장소 새로운 발견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희열을 안긴다. 그 희열은 또 다른 충동으로 이어진다. 스스로 그어놓은 선을 넘게 부추긴다. 정작 그 선을 넘고 나면 과거 머뭇거렸던 자신에 대한 안쓰러움과 용기 낸 자기에게 양가감정을 느낀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찾게 되는 것이다. 백지 위에 점 하나 찍으면서 말이다.


눈앞에 백지를 보고도 점찍을 용기 내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백지는 백지로 있을 때 존재가치 있다고 스스로에게 세뇌시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비겁한 나를 합리화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삶은 늘 백지만 바라보는 멍한 상태로 이어졌다. 초점이 없으면 어디로든 가면 그만이다. 어디에 닿든 그곳에 만족해하면 살아졌으니까. 용기 없는 자에겐 그마저도 과분하다. 하루를 살 의미를 좇기보다 하루를 살아냈다는 안도감이 더 필요했다. 그게 잘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스스로에게 안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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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무심코 점을 찍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무시해도 될 만한 점이었다. 얼떨결에 찍힌 점에 자꾸 시선이 멈췄다. 백자에 점을 계속 응시하면 점은 점점 커 보인다. 착시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스스로 몸집을 키웠다. '나 여기 있다'라고 점점 존재를 드러냈다. 어느 순간 눈알을 굴려도 점은 눈에 들어왔다. 아니, 눈을 감아도 그 안에 똬리를 틀었다.


그때부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은 여백을 내 마음대로 채워보고 싶어졌다. 40년 넘게 부정했던 용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어느 새벽 글 한 줄에 주체할 수 없이 터져버린 눈물이 내 안의 두려움을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들 듯 흘러내렸다. 그때 이후 백지 위해 선을 긋고 도형을 그리고 색을 칠하며 나만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중이다. 석공이 돌을 깎고 다듬으며 돌 속에 숨겨진 그 무언가를 찾아내듯이.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 아침, 점심, 저녁, 유년, 중년, 노년. 인생도 하루도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끝맺기 달라진다. 다행히 인생은 수많은 하루가 쌓여 결말로 이어진다. 바꿔 말하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도 원하는 결말을 맺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루는 아침으로 시작한다. 아침은 흰 종이와 같다. 티끌 없는 상태로 시작된다. 그곳에 점을 찍을 수도 선을 그을 수도 있다.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낙서가 될 수도 명작이 될 수도 있다.


백지를 바라만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는 백지가 망가지는 게 두려워 점조차 찍을 용기 내지 않는다.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반대로 누구는 찰나의 용기로 점부터 찍는다. 점이 찍히는 순간 백지는 더 이상 백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러고 나면 자신감이 붙고 마음껏 그려나간다. 유치원생 수준으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그려내도 오롯이 자기 의지대로 완성해 낸다. 그렇게 한 장씩 쌓이면 어느 순간 제법 근사한 장면이 담긴다. 흉내 내 그리는 사람이 생기고 심지어 돈을 받고 팔기도 한다. 백지 위에 점 하나 찍은 용기가 만들어 낸 결과이다.


아침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똑같은 크기의 흰 종이가 주어지면 그 안에 무엇을 그릴 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그 선택에 따라 백지의 가치도 달라진다. 점 하나를 찍어도 그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근사한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이 말은 오늘 나의 행동마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지 못한 행동이 반복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인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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