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2026년 창업도약패키지(일반형) 서류평가 결과 안내 메일 보내드렸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있었다. 마침 메일을 창을 열어둔 터라 새로고침을 눌렀다. 새 메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창을 열었다 닫았다 몇 번 반복했다. 혹시 몰라 다른 사이트 메일까지 열어봤다.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던 사이트에도 접속해 봤지만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서둘러 대표번호로 전화했다. 상담원 설명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이트 몇 개를 열어본 끝에 결과를 확인했다.
마우스를 누르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우스 포인터가 내 뜻대로 움직이 않았다.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화면 여기저기 훑고 다녔다. 주관부서 공지사항에 1차 합격자 명단과 마주했다. 화면이 바뀌며 접수번호와 이름이 적힌 목록이 보였다. 목록을 한 장씩 내리며 번호와 이름을 확인했다. 8장짜리 명단을 다 읽어도 내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선정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간절히 바랐던 만큼 꼭 될 거라 믿었다. 목록을 보고 또 봤다. 화면은 계속 바뀌었지만 내 이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작년 12월부터 준비해온 프로젝트였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AI에게 질문하면서 조금씩 구체화시켰다.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며 확신이 생겼다. 이 앱을 개발하면 분명 사람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었다. 나도 이제까지 경험해 본 적 없었기에 더 의지가 생겼다.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고 개발업체에 의뢰해 제작에 들어갔다. 그 사이 우연히 창업 지원 공고를 봤고 서둘러 지원했다. 그때까지 프로젝트 이름을 정해놓지도 않았다. 누구와 공유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면서 그제야 이 프로젝트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온도 산출 알고리즘을 활용한 실시간 **활동 기반 **현황 지표 플랫폼'
(**으로 가린 부분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고 아직 출시 전이라 보안이 필요하다)
난생처음 사업계획서를 쓰면서 기대감도 생겼다. 일 년 치 연봉 이상을 투자 받으면 이 앱에 더 많은 기능을 넣을 수 있겠다 싶었다. 기능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마케팅도 가능했다. 그러니 반드시 1차 서류 전형에 합격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기대와 애착이 컸던 터라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마도 1차 합격자 명단을 몇 번이나 훑어본 게 그래서였던 것 같다. 의자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며 지금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서류 전형에 통과하지 못한 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내 아이디어를 정리해 기획서를 제출하는 것까지였다. 평가는 그들의 몫이다. 그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나의 역할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행동은 분명하다.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다.
열렸던 모든 창을 닫았다. 블로그를 새로 열어 빈 화면을 펼쳤다. 써야 할 글을 쓰기 시작했다. 1시간 30분 동안 매달렸다. 다 쓰고 나니 2시가 넘었다. 포스팅에 집중한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오히려 글 한 편 써낸 성취감이 차올랐다. 만약 그 사이 떨어졌다는 감정만 붙잡고 있었다면 느끼지 못할 기분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한 게 기분 전환은 물론 시간도 가치 있게 사용하게 했다.
<인생 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애도(죽음)의 5단계로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고 정의했다. 애도뿐 아니라 나처럼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전한다. 불합격 통보를 받으면 가장 먼저 결과를 부정한다. 내가 명단을 여러 번 본 것처럼 말이다. 그다음 떨어진 걸 확인하면 나를 떨어트린 그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정작 분노한들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그제야 느끼고 스스로 타협한다. 그리고 상황을 받아들이고 합격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우울감에 빠진다. 누군가는 이 우울감 때문에 술을 찾고 심하면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기도 한다. 다행히 이 우울감에 빠져나오면 그제야 모든 상황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인 '재기'를 시작한다. 처음부터 시작하든 아니면 멈췄던 곳에서 다시 도전을 선택한다. 이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온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서너 시간도 지나지 않아 부정에서 재기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사이 감정을 다 뛰어넘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찰나의 선택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와 상관없이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게 그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 감정을 느끼는 그대로 글로 남겼다. 글로 남기는 과정에서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알아차렸다. 알아차리면 인정하게 된다. 인정은 곧 수용이다. 그때 비로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내 감정에 이름표를 붙일 수 있는 게 글쓰기이다. 이름이 붙은 감정은 존재를 드러낸다. 눈에 보이는 감정을 어떻게 대할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다룰 수 없기에 우리는 놀아날 수밖에 없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같은 감정이 그렇다. 그래서 틈틈이 내 감정이 어떤지 기록해 놓으면 쉽게 놀아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감정을 알아차리게 된다. 감정의 중심을 잡는 것이다. 그러니 내 감정을 글로 쓰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주도권을 쥐고 산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감정을 글로 썼을 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