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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n 23. 2021

이등병때 맛 본 어머니의 손맛

마흔의 밥심

사건은 가벼운 농담에서 비롯되었다.

“다음은 K관사 보수작업 호명하는 사람은 옆으로.”

이등병이었던 나를 마지막으로 8명이 한 줄에 서게 되었다. 조금은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1년 12달 중 10달은 사령부 소속 예하 부대 건물 보수 작업이 주 임무였다. 군에서 부여하는 공식적인 주특기 외에 자대에서는 건물 보수 작업에 필요한 별도의 주특기를 갖게 된다. 목수, 배관, 난방, 미장, 타일, 전공 등 한 팀을 이뤄 작업이 가능하도록 인원이 구성된다. 기술이 없어도 선임과 함께 다니며 숙련될 때까지 배우고 실습을 하게 된다. 2년 동안 배우고 익히다 보면 기술자 못지않은 실력을 갖고 제대하게 된다. 당시 나는 ‘미장’에 편성됐다. 쉽게 설명해 모래와 시멘트를 이용하는 모든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모래와 시멘트를 비벼 벽돌을 쌓고, 보기 싫은 벽돌 면 위에 시멘트와 모래를 섞은 시멘트 반죽을 이용해 매끄러운 면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기술을 배우기 전엔 선임을 보조하기 위해 40kg 시멘트 한 포를 수 십 수 백 번 들어 옮겼고, 수 십 수 백 번 삽으로 모래를 날랐다. 이런 고된 작업을 일주일 내내 해야 했다. 대부분 자대를 벗어나 서울 인근에 위치한 부대를 찾아가며 작업을 이어갔다.      


K관사는 집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있었다. 작업 준비를 마치고 8시쯤 자대를 빠져나왔다. 트럭 뒤에 나란히 앉아 서울 시내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날 작업도 힘쓸 일이 많아서 인지 다들 말을 아꼈다. 30분 정도 달린 트럭은 K관사에 멈췄다. 준비해온 자재와 공구를 내리며 작업 준비를 했다. 이미 군복은 반쯤 젖어 있었다. 원래 군인은 아무데서나 군복을 벗어서는 안 된다. 단 작업 간에는 복장을 통일하는 조건으로 상의를 벗을 수 있게 허락되어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미 상의는 벗었고, 시간이 갈수록 작업의 강도가 세지고 있었다. 군대에서도 50분 작업 10분 휴식은 지켜진다. 10시쯤 첫 번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평소 대화를 자주 나눠 나에 대해 잘 아는 선임이 말을 걸었다.

“김 이병! 네 집이 이 근처라고 하지 않았냐?”

“이병 김형준, 네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슈퍼 하신다고 그랬지. 여기서 얼마나 걸리냐?”

“네 맞습니다. 여기서 2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정말? 진짜 가깝네. 너 집에 전화한 지 얼마나 됐냐?”

“잘 모르겠습니다.”

“모를 정도면 전화 안 한지 꽤 됐겠구나. 내가 전화카드 줄게 전화하고 올래?”

“잘 못 들었습니다.”

“괜찮으니까 전화 한 통 하고 와. 안부도 전하고 지금 우리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간단히 말씀드리고.”

“네 알겠습니다.”

선임의 손에 이끌려 근처 공중전화로 갔다. 오전이라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다.

“아버지 저예요. 별일 없으시죠?”

“어! 막내냐? 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냐? 전화할 수 있는 시간도 아닐 텐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근처로 작업을 나와 있어서 선임이 전화할 수 있게 해 줬습니다.”

“근처? 어디쯤이니?”

“아! K관사라고 20분 정도 걸리는 곳입니다.”

“그래?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선임한테 물어봐. 아빠가 가도 되는 곳이면 먹을 것 챙겨서 갈게.”

전화를 끊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선임에게 물었다. 선임의 표정에도 내심 아버지가 와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려. 부대 안에서 작업하는 게 아니니까 괜찮다고 알려드려.”

“아버지, 오셔도 된다고 합니다. 관사 작업이라 출입 통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다. 점심시간까지 가는 건 좀 무리니 2-3시쯤 간식거리 챙겨서 가마.”

그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졌다. 위병소가 있는 부대였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여느 아파트 단지와 다름없는 곳이라 가능했다. 이 소식이 함께 있는 부대원에게 전해졌고 모두 기대에 들떠 점심도 대충 먹고 오후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전부터 이어진 작업으로 입고 있던 러닝에는 하얀 소금 선이 나타나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되어 갈 즘, 익숙한 색의 다마스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차에서 내린 아버지가 다마스 뒷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눈에 보이는 음식에 자연히 탄성이 터졌다. 부모님은 손이 크다. 더욱이 군대 간 자식이 휴가도 아닌 상황에서 맛있는 게 먹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으니 한 상 가득 차려지는 게 당연했다. 과자와 음료수가 담긴 박스, 김밥과 샌드위치가 담긴 박스. 대충 봐도 8명이 먹기엔 차고 넘쳤다. 아버지는 배달 온 듯 준비해온 음식을 내려놓고 나와 몇 마디 안부를 나누고 용돈을 넣어주신 뒤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10분 남짓 짧은 만남이었다. 어머니는 가게 때문에 오시질 못했다. 그렇게 되돌아가는 다마스를 보며 아쉬움이 남았다. 이 날 사건이 자대에도 소문이 났고 다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이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제대할 때까지 똑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그날을 다시 떠올렸다. 그날 아버지가 가져온 음식의 양을 봐서는 두어 시간 내 준비하기에 충분치 않았을 것 같았다. 군대에 있을 걸로 알고 있던 막내아들의 뜬금없는 전화를 받고 얼마나 놀라셨을까. 또 먹고 싶은 게 있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부모는 아무도 없을 거다. 기회가 없을 뿐이지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해주겠는가. 어머니의 손이 얼마나 바빴을지 떠올랐다. 김밥을 말고, 샌드위치를 만드는 손이 얼마나 떨리셨을까? 급하게 만든 김밥이 맛이 없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다 만든 음식을 차에 실어 보내며 열어 놓은 가게 때문에 따라나서지 못한 아쉬움이 얼마나 컸을까? 맛있게 먹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아쉬웠을까? 그때는 몰랐다. 당연한 걸로만 알았다. 군대 가있는 자식이니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조금은 특별했던 상황과 부모님 덕분에 한 동안은 이쁨을 받으며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자식은 평생 자식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부모님 심정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내가 부모가 되어 내 자식이 그런 부탁을 한다면 과연 그만큼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아마 여기저기서 만들어 놓은 음식을 사다가 챙겨가는 건 흉내 낼 수는 있지만, 그때 두 분의 마음만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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