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흠뻑 젖은 11살

by 김형준

6시 정각. 오늘도 칼퇴근이다. 1분의 오차도 없이 지문인식기에 기록을 남겼다. 비가 온다. 가방에 우산이 있다. 우산을 쓰자니 손이 번거롭고, 안 쓰려니 적은 양은 아니다. 지하철, 버스 결정하지 못하고 일단 지하철역까지 걷는다. 지하철역 100m 앞두고 버스가 온다. 뛰어가 올라탄다. 창가에 자리 잡고 사람 구경을 시작한다. 비 온다는 뉴스를 못 들은 사람이 많은가 보다. 비 맞는 사람이 제법 보인다. 이맘때 비는 찬 기운과 함께 온다. 젖은 옷에 찬 바람이 스미면 감기도 덩달아 기승을 부린다. 괜한 걱정으로 오지랖을 떤다. 마음속으로.


초등학교 4학년, 두 시쯤 수업이 끝났다. 실내화를 갈아 신기 위해 1층 현관에 선다. 비가 온다. 장대비는 아니다. 손에 우산이 없다. 엄마가 와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전화도 없던 때다. 전학생에게 온정을 베풀 친구는 아직 없다. 집도 멀다. 당시는 학교에 맞춰 집을 구할 형편이 아니었다. 집이 구해지면 거기서부터 학교를 찾아가야 했다. 11살에게 도로를 따라 걸으며 몇 개의 횡단보도, 철도 건널목, 굴다리 터널, 다리가 뻐근할 정도의 큰 언덕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마른날에도 30분은 걸어야 집에 도착한다. 비까지 오니 갈길이 막막하다. 잠시 엄마를 기다리 척 현관을 서성여본다. 혹시 누가 말을 걸어줄까 기대하며. 역시나다. 기다리는 사이 한 명씩 자리를 떠난다. 멀리 학교 정문에서는 먼저 와 기다리는 엄마나 아빠를 만나는 친구도 보인다. 부럽다. 부럽다고 우산을 씌워주지 않는다. 더 이상 기다리며 눈치 볼 여유가 없다. 비를 뚫고 가야 조금이라도 더 TV를 볼 수 있다. 아쉬운 마음에 실내화 주머니를 머리에 얹어본다. 타조가 된 듯 비가 덜 맞길 바라며. 정문을 빠져나와 인도로 올라선다. 그 잠깐이지만 이미 윗옷은 반이 젖었다. 이내 깨달음을 얻는다. 실내화 주머니는 해답이 아니다. 쓰나 안 쓰나 마찬가지, 두 팔 들고 벌 받느니 당당히 걷자.


키가 작았다. 보통 키 어른의 가슴팍 정도 자랐다. 우산 쓴 어른들 틈에 내가 보일 확률이 낮았다. 애먼 기대를 건다. 누군가 우산을 씌워주지 않을까? 애먼 기대였다. 그사이 윗옷은 다 젖었다. 윗옷을 적신 빗물이 뭉쳐 바지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 걸음이 무거워지는 건 신발도 한껏 빗물을 머금어서다. 양말도 이미 뽀송했던 감촉을 잃었다. 이제 겨우 절반 왔다. 빗줄기는 여전하다. 그나마 이때는 지금처럼 미세먼지, 매연, 황사는 없었다. 비를 맞고 놀아도 어른들의 걱정은 덜 수 있었다. 그저 비로 인해 감기 걸리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스며오는 빗물을 막지 못하고 팬티까지 젖자 이내 모든 걸 내려놓는다. 더 이상 옷이 젖는 걸 신경 쓸 이유가 없어졌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남은 길을 걷는다. 저 멀리 집이 가까워 왔음을 알리는 언덕이 보인다. 저 언덕을 내려서야 집에 다 온 거다. 오는 동안에도 엄마가 마중 올 거란 기대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마중은 무의미하다. 옷이 덜 젖거나,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어야 마중도 제 역할을 했을 거다. 이 또한 내려놓으니 발걸음이 더 가볍다.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뺨 위를 흐르는 건 분명 빗물이다. 입에 닿은 빗물은 싱겁지만은 않았다.


버스가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그사이 버스 안은 앉은 사람 선 사람으로 꽉 찼다. 빗방울도 점점 굵어진다. 비를 피해 들어간 건지, 원래 찾아간 건지 알 수 없지만 가게 곳곳은 손님이 제법 있다. 저 중에는 비가 땅에 닿는 소리가 기름 가득 두른 프라이팬 위에 전 부치는 소리와 같아서 막걸리 한 잔 생각난 사람도 없진 않을 테다. 아니면 월요일 원래 한 잔 하는 날이라는 라때의 감성을 자극하며 둘셋 모이는 이도 있을 테다. 그 무리에 끼는 대신 집을 선택했고, 버스에 편히 앉아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이렇게 추억 한 조각을 끄집어내 본다.


아마 사는 동안 11살 그때처럼 온몸이 젖을 만큼 비를 맞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없어야 한다. 그렇게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건 좋은 일 보단 안 좋은 일일 테니 말이다. 그저 그때 그렇게 흠뻑 젖으며 집에 올 수밖에 없었던 조금을 가여웠던 내가 있었음을 기억하련다. 그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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