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를 다시 시작한 지 3개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막막했던 처음과 달리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입소문인지 개업 덕인지 매출도 조금씩 오르고 있다. 이 시기만 잘 넘기면 자리 잡는 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멀쩡한 가게를 보증 때문에 말아먹고 다시 재기하는 것치곤 회복이 빠르다. 둘이 벌으니 이전으로 돌아가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이왕 벌어진 일 빨리 털어버릴수록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나저나 아이들이 걱정이다. 전학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새 아들이 잘 적응해줘야 할 텐데.
며칠 전부터 근처 대학 배구부 선수들이 오기 시작했다. 키가 유난히 컸던 운동복 입은 세 명이 처음 가게를 찾았다. 가뜩이나 좁은 가게가 더 좁게 보였다. 먹성이 좋아한 사람당 3인분씩 거뜬히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장사는 쩨쩨하면 안 된다는 원칙대로 최대한 푸짐하게 차려줬다. 든든하게 먹었는지 연신 고맙다는 인사와 친구들도 꼭 데려오겠다는 인사치레까지 받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뒤로 비슷한 키의 운동복 입은 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다. 한 번 다녀갈 때면 만들어놓은 떡볶이, 순대, 튀김은 남기지 않고 먹었다. 거기에 라면 하나씩 추가로 먹으니 안 바쁠 수 없다. 몸이 부서져도 좋다. 매일 이렇게만 팔아주면 금방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국민학교를 다니는 둘째와 막내가 걱정이다. 학기가 반이나 지났는데 아직 적응을 못 한 것 같다. 성남 살 때보다 더 말수가 줄었다.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안 난다. 오늘따라 유난히 가방 멘 두 어깨가 처져 보였다. 개나리도 활짝 폈으니 학교에서 돌아오면 잠깐 둑방에라도 다녀와야겠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물어봐야겠다.
장사 준비로 정신없이 오전을 보냈다. 이제 곧 손님이 올 때다. 2시 면 점심 장사 끝나고, 그때면 막내도 올 거다. 서둘러 마쳐야겠다. 마지막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데 문 사이로 비 오는 게 보인다. 장대비는 아니지만 제법 온다. 시계를 보니 1시 반이다. 우산을 안 들려 보낸 게 기억난다. '데리러 가야 하는데.'
앞치마를 풀렸는데 문이 열린다. 배구부 선수들이다. 다섯 명이나 왔다.
"이모님 조금 늦었는데 식사할 수 있어요?"
안 된다고 할까? 아니야. 다섯 명이면 매상이 얼마야. 그래 차려주자. 막내는 친구 우산 쓰고 같이 올 거야. 그렇게 할 거라 믿는다. 한 시간이 지났다. 다섯 명이 주문하는 걸 차려내느라 정신 없이 지나갔다. 빈자리에 빈 그릇만 남았다. 막내가 올 시간 지났는데 안 왔다. 집으로 바로 갔나? 이 시간이면 출출하다며 왔을 텐데 이상하다. 배구부 선수 덕분에 곧바로 저녁 장사 준비를 해야 한다. 막내는 저녁밥 먹으러 오면 그때 보면 되겠지.
해가 넘어가면 손님이 들기 시작한다. 퇴근길에 들르는 포장 손님이 많다. 가게 안에는 낮동안 고됐는지 순대 한 접시에 소주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켜는 손님, 학원 가기 전 허기를 달래려 급하게 면발을 삼키는 학생, 엄마손을 이끌고 와 맵다며 물을 더 먹으면서도 기어이 떡볶이 한 접시를 다 먹는 막내 또래 여자아이. 그 사이 세 아들이 저녁밥을 달라며 왔다. 빈 테이블에 있는 반찬으로 상을 차린다. 반찬 투정 안 하는 세 아들 덕분에 밥상 차리는 고민은 덜하다.장사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무던한 아들 덕분이다. 아이들이 밥 먹는 사이 남아있던 손님도 자리를 비웠다.밥 먹는 동안 집에 다녀오겠다고 가게를 나섰다. 밤늦게 찾는 손님도 있어 이맘때 집을 정리해야 수고를 덜 수 있다. 아들이 셋 이어도 살림을 맡길 수 없다. 머슴아들이라 살림엔 소질이 없다. 어지럽히지만 않아도 돕는 건데 그것도 안 한다. 들판의 잡초만큼 잔소리했지만 소 입으로 들어가는 풀처럼 대꾸도 없이 삼키기만 한다.
비 온 뒤라 집도 어수선하다. 치워도 표 안나는 방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다. 멋대로 벗어놓은 양말, 먹고 난 과자봉지, 널브러져 있는 교과서, TV 앞에 나란히 자리한 베개들. 볼 때마다 화가 나지만 한 편으론 어미인 내가 제 자리에 없기에 당연한 풍경이 아닐까? 속 깊은 곳에서 솟꾸치는 뜨거운 덩어리를 애써 눌러본다. 식당에서 세 끼를 해결하다 보니 주방 겸 욕실에서는 빨래와 씻기만 한다. 밀린 빨래를 돌리기 위해 세탁기를 열었다. 아침에 막내가 입고 갔던 옷이 흠뻑 젖은 채 돌돌 말려있다. 얼마나 젖었길래 저렇게 돌돌 말려 진 체 옷을 벗었을까.집에 온 지 한참 됐을 텐데 비 맞고 왔다고 말도 안 하네. 서운했을까? 친구들은 엄마나 아빠가 데리러 갔을 텐데, 지만 아무도 안 와서 속상했을까? 비가 와도 자식새끼 데리러도 못 가는걸 어미라고 할 수 있을까? 떨리는두 팔에 힘을 주고 젖은 물기를 짜낸다. 원래 모양대로 반듯하게 펴서 세탁기에 다시 넣었다. 세탁기만 돌려놓고 다시 가게로 갔다.
"다 먹으면 좀 치워놓지, 그러고 TV만 보고 있니? 이제 이 정도는 너희들이 할 수 있잖아."
막내에게 미안한 마음에 괜한 짜증을 냈다. 어미라고 다 이해해주지 않는다. 많은 걸 참아야 하는 건 맞지만 때로는 내 뜻대로 안 되는 아이들에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오늘은 좀 참을 걸 그랬다. 나도 표현이 서툴다. 내 성격을 닮은 막내도 갈수록 무뚝뚝해지는 것 같다. 가뜩이나 전학까지 왔고, 오늘처럼 비 오는데 마중도 안 나온 나에게 서운했을 거다. 알면서도 짜증부터 냈다. 이미 뱉은 말 때문에 분위기가 냉랭하다.
"다 먹었으면 집에 가서 숙제해. 집도 좀 치우고. 돼지우리도 니들 방보다 깨끗하겠다. 말 안 하면 안 하니?"
세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만 한다. 풀이 죽은 체 가게를 나선다. 뒷모습을 보니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막내에게 제대로 말도 못 했는데. '미안하다 막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