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그저 듣고만 있어도 좋구나

by 김형준

퇴근길, 첫 번째 환승역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보통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두 가지 경우다. 금요일 저녁 메뉴 결정이거나, 약속이 생겼을 때다. 오늘은 후자였다. 며칠 전부터 계획했지만 시간은 정하지 못했던 약속이었다. 미리 알고 있던 일정이라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했다. 뒤따라오는 걱정이 있었다. 엄마 아빠 오기를 기다리는 두 딸의 저녁밥이다. 아내는 딸들에게 아빠와 상의하라고 했단다. 집에 도착하려면 1시간 반이나 남았다. 8시 넘어 도착해 저녁을 준비하려면 늦을 것 같았다. 평소 금요일은 1주일 한 번 외식하는 날이다. 두 딸도 배달음식이 익숙하다. 먹고 싶은 걸 정해 알려달라고 숙제를 줬다. 잠시 뒤 큰딸이 문자로 답했다.

'자장면으로 결정했어, 아빠.'

타고 있던 버스는 한 시간 뒤에나 집 앞 정류장에 도착할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배달되는 음식점을 찾아야 했다. 각각의 음식점은 배달 예상시간을 표시하고 대부분 그에 맞게 배달된다. 자주 주문하는 음식점의 예상 시간이 1시간으로 표시되어 있다. 안심하고 주문했다.

'1시간 뒤 음식 도착 예정. 아빠도 그때 도착할 듯.' 문자를 남겼다. 혹시 몰라 주문한 메뉴도 알려줬다.

'자장면 2그릇, 탕수육 중. 먼저 도착하면 받아 놔.'


몇 정거장을 남겨두고 큰딸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문 밖에 누가 있어. 여자인데 벨을 눌러."

"어! 음식 배달하는 분 일거야. 놓고 갈 거니까 조금 있다가 나가봐."

"알았어"

잠시 뒤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배달 기사분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현관 앞에 놔두면 된다고 설명했다. 배달 기사일 거라는 걸 알지만 두 딸은 선뜻 현관문을 열지 않았다. 기초교육(?)을 잘 받았다고 해야 할까, 일단 본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조건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배달 기사분에겐 미안한 상황이 었지만 차분하게 대처한 두 딸이 대견(?)했다. 조금 더 성장하면 이런 상황도 스스로 대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는 사이 나도 집 앞 정류장에 내렸다. 집에 도착하니 자장면을 먹고 있었다. 시킨 대로 상을 차려 둘이 한 그릇씩 먹고 있었다.


네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땐 주로 아내와 딸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는다. 나는 주로 듣고 있다가 한 두 마디 거드는 정도다. 아내가 없는 밥상이라 약간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수저를 챙겨 내 자리에 앉았다. 둘째가 먹던 자장면을 조금 덜어 먹었다. 큰딸은 이제 한 그릇은 거뜬히 먹어서 덜어 먹을 수 없었다. 대신 남은 탕수육을 먹었다. 둘째는 얼굴에 자장면 세수를 하며 연신 면발을 빨아 당기고 있었다. 얼른 먹고 TV를 보기 위해서다. 큰딸은 나와 먹는 속도를 맞추려는지 천천히 먹었다. 둘째가 자리를 뜨자 둘 만 남았다. 자장면이 맛있었는지 먹는 내내 입이 멈추지 않았다. 음식이 들어가는 입, 말하는 입이 따로 있었다.

"아빠, 오늘 원더우먼 볼 거야? 그전에 슬기로운 산촌생활도 하고, 걸스 플래닛도 하는데 차례로 보면 안 되지?"

"슬의촌 오늘부터 시작해? 그거 봐야지. 원더우먼도 당연히 보고. 걸스 플래닛 오늘은 경연하니? 지난주에는 순위 발표만 해서 지루하던데."

"오늘은 다시 경연이라 꼭 봐야 해. 그럼 순서대로 보면 되겠네. 아, 유미의 세포도 보면 안 되지?"

"유미 세포는 너무 늦지 않나? 그건 좀 두고 보자. 일단 밥 먹고 보고 싶은 거 봐."

그 뒤로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 누구누구에 대한 이야기, TV 프로그램 이야기 등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수다를 떨어줬다. 나도 맞장구를 치며 남은 탕수육을 다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 나눈 대화는 시답잖은 내용이 전부였다. 어쩌면 그런 시답잖은 대화가 아이들에겐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부모라고 해서 대화를 통해 무언가 가르치겠다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싶다. 딸의 말에 그저 맞장구치며 공감해 주는 게 거리를 좁히는 시작이지 않을까?

'라포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상호 신뢰 관계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보통은 심리 치료나 취재, 범인 심문 등에 활용된다. 몇몇 기술을 이용해 오랜 시간 상대방과 일체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상대방의 행동, 말투, 표정 등에 자신을 맞추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하고, 이를 통해 보다 친밀한 사이가 된다. 상대방을 친밀하다고 느끼게 되면서 무슨 말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딸과 나 사이에 '라포르'라는 어려운 용어보다 그저 '아빠와 딸' 이기에 무슨 말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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